내년부터는 사실상 기술탈취 모든 분야에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도입된다. 상생협력법이 규정한 수·위탁거래에서 발생하는 중소기업 기술자료의 부당 사용 행위부터 하도급 거래 과정의 기술유용행위까지 최대 3배까지 손해배상을 물리는 것이 가능해진다. 특히 하도급 분야에서는 최대 10배까지 징벌적 손해배상을 확대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정부의 지나친 규제 일변도 기술보호 방침에 대기업의 활동이 크게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도 덩달아 터져나오고 있다.
◇하도급 기술유용, 10배 징벌적 손배제 추진
상생협력법 개정안이 10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되면서 정권 출범 초기 발표한 중소기업 기술탈취 근절 대책 가운데 상당수가 약 4년 만에 일제히 시행된다. 당초 기술탈취 근절대책의 핵심 입법 과제로 꼽은 △특허법 △부정경쟁방지법 △산업기술보호법을 비롯해 이날 상생협력법까지 국무회의를 통과해 내년 시행을 앞뒀다. 특허법과 부정경쟁방지법, 산업기술보호법은 각각 특허권과 영업비밀, 산업기술 침해 행위에 최대 3배까지 징벌적 손해배상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지난달 국회는 상생협력법 개정안과 함께 하도급 관계의 기술유용행위에 대한 처벌을 규정한 하도급법까지 함께 통과시켰다. 상생협력법과 마찬가지로 기술자료를 제공하는 경우 비밀유지계약(NDA)을 반드시 체결하도록 했다.
하지만 상생협력법과는 달리 대기업에 입증책임을 부여하는 내용은 담기지 않았다. 대기업의 입증책임 부담 확대로 인해 기존 사업자와 거래를 줄이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사실상 대등한 관계로 취급되는 수·위탁거래와는 달리 하도급 거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완전히 종속적인 거래 관계로 묶여 있다는 점이 입증책임이 포함되지 않은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대신 정부와 국회에서는 대기업의 재무 부담을 대폭 강화하는 방식으로 하도급 시장에서 기술탈취 관행을 근절한다는 방침이다. 현재 국회에는 하도급 관계에서 발생하는 기술탈취 관련 손해배상 금액을 최대 10배까지 확대하는 방안이 계류돼 있다. 이미 하도급 분야는 2011년부터 최대 3배까지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적용하고 있다. 송갑석·이학영·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해당 법안을 각각 대표 발의했다.
앞서 국회를 통과한 하도급법에 담긴 NDA 체결 의무화 조항과 함께 중소기업의 소송 부담을 줄이기 위한 조치다. 여당 관계자는 “종속관계에 있는 하도급 거래 관계에서는 손해배상금액을 높이고 표면적으로 대등한 관계에 있지만 실질적인 종속 관계인 수·위탁관계는 입증 책임을 강화하는 것이 핵심”이라면서 “대기업의 기술탈취를 완전히 뿌리 뽑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좁혀지지 않는 시각차...중소기업 기술보호 역량 강화가 핵심
정부가 2018년부터 대대적으로 추진한 중소기업 기술탈취 근절 대책은 쉽사리 진척되지 않고 있다. 정작 중소기업의 기술보호 역량은 강화하지 않은채 대기업을 기술탈취의 주체로 규정하고 규제 일변도 정책을 펼친 것이 주된 원인으로 지목된다.
대기업 대비 중소기업 기술 보호 역량은 크게 부족하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중소기업 기술보호 점수는 47.5점에 불과하다. 대기업의 69.3점, 중견기업의 66.8점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지난해 48.5점으로 소폭 상승했지만, 2016~2017년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기술유출 사고가 발생하는 주된 이유도 △회사의 보안관리, 감독체계 미흡 △임직원의 보안의식 부족 △보안관련 투자 미흡 등이 꼽힌다. 근절 대책 안팎으로도 중소기업의 기술보호 실태는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대기업이 정부의 규제 일변 조치에 반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술유출 피해 금액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대기업에만 지나친 부담을 지운다는 불만이다. 중기부에 따르면 2019년 기준 기술유출 피해 금액은 102억원으로 직전년도의 1119억원에 비해 큰 폭으로 감소했다.
대기업 측에서는 실제 기술유출이 줄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정부에서는 중기부에서는 기술유출 피해액 감소가 대기업의 불복소송 제기 증가로 인한 것이라며 시각차가 뚜렷하다. 벤처·스타트업 일각에서는 대기업이 과거와는 달리 인수합병(M&A) 또는 투자 유치 등의 명목으로 기업설명회(IR)를 열고, 아이디어를 탈취하는 방식으로 기술탈취 관행이 변화하고 있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대기업 측에서는 중소기업의 기술보호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문제 해결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안이라는 시각이다. 최근 대기업 안팎에서 확산하고 있는 개방형 혁신 역시 이번 법 개정으로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국내 대기업의 협력사 기술 보호와 지원 노력이 확대되고 있다”면서 “특허개방과 공동 기술개발 등 기술지원의 다양화는 물론, 기술자료 임치 지원과 같은 기술 보호도 늘리고 있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업계 안팎에서는 이번 상생협력법 개정이 단순히 대기업 규제보다는 중소기업의 기술보호 역량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번 법 개정을 계기도 도입된 법원의 자료제출명령제도를 바탕으로 기술자료를 비롯한 지적재산 등 다양한 영업비밀에 대한 보호 인식을 높여야 한다는 시각이다.
장태관 경청 이사장은 “징벌적 손해배상과 손해액 산정의 구체적 규정 마련으로 합리적인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적 단초는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면서 “무엇보다 소송과정에서 실제 제도를 적용하는 법원의 강력한 의지가 필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기부에서도 향후 시행령 개정 과정에서 표준비밀유지계약서에 담긴 세부 사항 등을 확정할 계획이다.
유근일기자 ryuryu@etnews.com, 성현희기자 sunghh@etnews.com
특허·부정경쟁방지법 등 국무회의 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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