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0년 초반 일본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다. 그러나 인터넷 부상과 함께 디지털 대항해 시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성장 신화는 막을 내렸다. 미국은 GAFA(구글·아마존·페이스북·애플)라는 거인들을 탄생시키고 디지털 제국으로 변신했다.
한편 일본은 경제대국의 초석을 성취한 전후 베이비 붐 세대가 현역에서 물러나고 초고령사회의 주역이 됐다. 세계 최초의 초고령국가로 진입한 일본은 혁신보다 보수적인 아날로그 체제를 견고하게 유지했다.
초고령화와 함께 출생률 감소가 겹친 일본은 생산가능인구의 부담이 급증하고, 경제·사회적 활력은 저하되는 장기침체의 늪에 빠졌다. 인구구조에서 파생하는 이러한 함정을 국제통화기금(IMF)은 축소경제학(Shrinkonomics:Shrink+Economics)의 표본으로 명명하고 일본이 주는 교훈이라는 부제목을 붙인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9월 1일 일본은 디지털 개혁(DX)을 전담하는 사령탑인 디지털청을 정식으로 출범시켰다. 직원은 600명 규모이고, 그 가운데 200명은 민간 인재를 등용했다. 총리가 행정기관의 장을 맡고 차관급으로 신설된 디지털감(監)에는 민간 전문가가 파격 기용됐다.
이처럼 디지털 개혁를 위한 총력체제를 갖춘 배경에는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위기 상황을 맞아 우왕좌항하는 디지털 낙후 국가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분초를 다투는 비상 상황에서 팩스·도장·종이로 상징되는 레거시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미동도 하지 않던 일본의 보수 자민당 체제가 기동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디지털 기반 행정 개혁이 머무르지 않고 일본사회 전체의 대개혁으로 급선회하는 디지털 긴급 발진이었다.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디지털청 발족과 함께 기존 정보기술(IT) 기본법은 폐지되고 '디지털사회형성기본법'으로 대체된다. 이 법에 의거한 디지털사회 형성을 위한 '신중점계획'을 책정한다. 신중점계획이 지향하는 궁극의 목표는 '디지털을 의식하지 않는 디지털 사회의 실현'이다. 또 총리와 전체 각료가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디지털사회추진회의'가 설치된다.
둘째 강력한 부처가 된 디지털청의 당면 과제는 디지털 정부 추진 50항목, 디지털 사회 공통 기반 정비 30항목, 의료·산업·과학기술 등 분야별 포괄적 데이터 전략 20항목, 관·민의 인재 양성 4항목이다. 이를 위해 관련 법제 기반이 패키지로 정비되고, 정부 전체의 디지털 시스템 관련 예산을 장악하는 권한도 주어졌다.
셋째 디지털청은 중앙부처뿐만 아니라 각 지방자치단체가 최대의 플랫폼이 될 수 있도록 시스템 기반을 통일·표준화, 전국 규모의 클라우드 체제 전환을 주도한다. 오는 2022년까지 마이넘버카드의 100% 보급도 최우선 목표로 제시됐다. 또 은행계좌와 연계함과 동시에 건강보험증, 운전면허증으로 이용하도록 법제를 갖췄다.
넷째 교육, 의료, 자동운전, 스마트시티 등 공공성 높은 분야 중심으로 현실 공간과 가상 공간이 동기화되는 고도융합시스템(digital twin)을 국가 프로젝트로 구축·운용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포괄적 데이터 전략이 정비된다.
일본은 지혜라고 하는 경영자원은 곧 암묵지(tacit knowledge)에서 유래한다는 아날로그 사고가 뿌리 깊은 나라다. 이러한 암반 구조를 뚫고 발족하는 디지털청은 지난 20년 동안 디지털 개혁의 반복된 실패를 일거에 만회하려는 절박한 배수진이라 할 수 있다.
세계적인 초고령화 추세와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중국에 이어 일본이 총력적인 디지털 국가 굴기에 나서고 있는 동북아시아 상황은 우리에게 예사롭지 않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IT 강국를 넘어 급박한 상황을 직시하며 치밀한 대응전략이 필요하다.
하원규 미래학자·디지털 토굴인 hawongyu@gmail.com
-
김현민 기자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