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한풀 꺾인 1966년 8월 24일.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 집무실에서 최형섭 한국과학기술연구소장으로부터 월례 업무보고를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보고 후 배석한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경제기획원에서 심의하고 있는 연구소 육성법을 조속히 입법화하고, 연구소 발전을 위해 면세를 비롯한 가능한 모든 조치를 강구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지시한 연구소 육성법은 한·미 간에 기정사실이 된 사항이었다. 그러나 입법 작업은 지지부진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영 부총리에게 조속한 입법을 주문한 것이었다.
연구소 육성법 제정은 1965년 12월 15일 미국 바텔기념연구소가 한·미 양국에 제출한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 및 조직에 관한 조사보고서에도 들어간 항목이다.
당시 바텔기념연구소가 한·미 양국에 제출한 육성법안은 7개 조항으로 이뤄져 있었다. 크게 △정부는 연구소 지원 육성을 보장해야 한다 △연구소에 대한 등록세, 취득세, 재산세, 연구소 설치 운영에 필요한 기계와 자재 등을 수입할 때 면세한다 △연구소가 필요로 할 때 국유재산을 무상으로 대여 또는 양여할 수 있다 △연구소에 공여하는 기계, 기구 자재 인수에 필요한 자금은 전액 정부가 부담한다 △정부는 연구소가 정상적인 운영이 가능하다고 인정될 때까지 운영비를 보조한다 등이다. 이듬해인 1966년 2월 4일 한·미 양국은 이런 내용의 연구소 설립 및 운영에 관한 협정서에 조인했다.
이후 연구소는 1966년 7월 1일 육성법안심의소위원회를 구성해서 육성법안을 가다듬었다.
연구소는 이틀 후인 7월 3일 이 육성법안을 경제기획원에 제출했다. 육성법안의 골자는 △정부가 연구소 건설비와 운영비 등을 출연할 수 있고 △정부는 연구소가 필요로 하는 국유재산을 무상으로 양여 또는 대여할 수 있으며 △연구소가 필요한 재정 지원을 한미 두 나라가 부담하지만, 연구소는 이에 대한 정부 회계감사나 사업계획 승인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국유재산을 무상으로 양여하지만 감사도 받지 않는다는 그야말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특별한 육성법안이었다.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의 회고록 증언.
“연구소의 자율성을 보장받기 위해 직접 조문을 만들어 정부에 제출했다. 우선 정부에서 주는 기부금을 출연금으로 명시했다. 기부금이란 말을 쓰자니 어감이 좋지 않아 대신 찾은 말이 출연금이었다. 또 연구소는 회계감사도 받지 않고 사업계획 승인도 받지 않는다는 파격적인 조문을 넣었다. 연구소 일에 정부가 이 일 저 일 간섭하면 되는 일이 없다. 처음부터 그런 일이 없도록 법안에 못을 박았다.(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경제기획원은 이 법안을 그해 10월 차관회의를 거쳐 국무회의에 안건으로 제출했다. 법안을 본 다수의 국무위원들은 반대했다.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의 이어진 증언.
“국무회의에서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국유재산 무상 양여 조항은 연구소가 민간운영 형태의 재단법인이어서 국유재산법에 저촉하는 것이 아니냐, 특히 회계감사도 없이 어떻게 정부 돈을 지원하느냐'는 등 반발이 거셌다.”
그럼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으로 국무회의를 통과한 육성법안을 12월 정기국회에 제출했다. 아니나 다를까. 소관 상임위원회인 재정경제위원회에서 거대한 벽에 부닥쳤다. 법안 내용을 본 야당 국회의원들의 반대가 엄청났다.
“도대체 이런 법안이 어디 있습니까.”
전상근 삼전복지재단 이사장(당시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장)의 회고.
“야당 의원들은 '연간 수십억원의 정부 재정 지원을 받는 연구소에 대해 국회나 정부가 회계감사도 할 수 없고 연간 사업계획서조차 정부 승인을 받지 않게 한 이 법안은 절대 통과시킬 수 없다'고 반대했습니다.”
전상근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장은 김태동 경제기획원 차관을 수행해서 국회 재경위원회에 출석, 한·미 두 나라가 설립한 연구소의 취지를 설명했지만 야당은 요지부동이었다.
“당시 재경위원장인 양순직 의원이 정부 입장에 찬성해 야당 의원인 고흥문 의원과 이충환 의원 등을 상대로 설득작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야당 측은 '법안을 수정하지 않는다면 절대 법안을 통과시킬 수 없다'며 반대했습니다.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법안을 일부 수정했습니다.”
경제기획원은 이튿날 수정안을 다시 국회에 제출했다. 수정한 내용은 '연구소는 회계연도별로 사업계획서를 작성해서 주무부처 장관의 승인을 받는다'로 변경했다.
12월 7일 밤 10시 42분 국회 본회의장.
△이효상 국회의장=의사 일정 제8항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육성법안(대안)을 상정합니다. 재경위원회 간사이신 박규상 의원께서 제안설명을 하겠습니다.
△박규상 의원=한국과학기술연구소 육성법안 재경위원회의 제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정부가 제안한 바 있는 연구소육성법안은 과학기술 활동을 종합적으로 수행하며 한·미 양국이 공동사업으로 설립한 재단법인 연구소를 보호·육성한다는 취지입니다. 이 법안 대안은 이런 취지에 찬성하면서 정부가 상당한 금액을 연구소에 출연하는 점을 감안해 출연금의 합리적인 사용을 위해 정관 변경과 연간사업계획서 승인을 주무장관이 하며, 연 1회 이상 회계감사를 주무장관이 하는 내용으로 수정한 대안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이 내용은 재경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해 법사위 심의를 거쳤습니다.
△이효상 의장=재경위원회 대안대로 가결하고자 합니다. 이의 없습니까? (이의 없습니다). 가결한 것을 선포합니다.
정부는 그해 12월 27일 연구소 육성법을 공포번호 1857호로 공포했다.
그러나 이 육성법은 시행도 하기 전에 과학기술계와 미국 측의 강력한 반발에 부닥쳤다. 이들은 육성법 반대운동도 전개했다. 사태는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과학기술계는 국회가 사업계획 승인과 회계감사 등 재규정을 신설한 것은 미국과 한국 간 협정에 따라 연구소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애초의 기본원칙에 부합하지 않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미국 지원에 차질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한 미국대사관과 유솜(USOM) 등도 육성법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나섰다. 경제기획원은 입장이 난감했다.
당시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장이던 전상근 삼전복지재단 이사장의 증언.
“과학기술계의 법안 반대운동에 저는 내심 찬성했어요. 국회 통과를 위해 야당 의원들의 요구를 법안에 반영해 육성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애초 한·미 간 기본원칙에는 맞지 않았어요.”
이런 가운데 해외 과학자 유치를 위해 2개월 동안 미국 등 해외 출장길에 올랐던 최형섭 소장이 12월 17일 귀국했다. 최형섭 소장은 육성법 내용을 보고 '이대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해결책은 박정희 대통령의 재개정 지시뿐이었다. 최형섭 소장은 청와대에 대통령 면담을 급히 신청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연구소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이 법안을 다시 개정해야 한다고 간곡하게 말씀드렸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전후 사정을 보고받고 경제기획원에 “육성법을 즉시 개정하라”고 지시했다.
경제기획원은 이듬해인 1967년 2월 9일 수정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자 야당 국회의원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시행도 안 해 본 법을 다시 개정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펄쩍 뛰었다.
같은 달 28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재정경제위원회에 최형섭 소장이 출석해서 육성법 재개정 이유를 소상히 설명하며 법안 통과를 설득했다.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의 회고록 증언.
“국회의원들에게 '과학기술이 정말 우리나라 발전에 절대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만일 그렇다면 저를 믿고 개정 법안을 통과시켜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한동안 의원들과 승강이를 벌였다. 그런 가운데 어느 의원이 '우리가 과학기술을 얼마나 아느냐. 최 소장이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절대 필요하다니 믿고 맡겨 보자'며 다른 의원을 설득해 겨우 개정안이 위원회를 통과했다.”
개정안은 9개 조항으로, 주 내용은 △제2조 1항에 건설비 다음에 운영비를 삽입한다 △제3조에 정부는 연구소의 설치와 운영을 위해 필요한 국유재산을 연구소에 무상으로 대부하거나 양여할 수 있다. 절차에 관해 필요한 사항은 국유재산법의 해당 규정에도 이를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제5조 연구소는 회계연도별로 사업계획서를 작성해 주무장관에게 보고해야 한다. △제6조 연구소는 분기별로 사업계획 집행 실적을 주무장관에게 보고해야 한다. 연구소는 정부가 지정하는 공인회계사의 감사를 받아 매 회계연도 세입세출결산서를 주무장관에게 제출해야 한다 등이었다.
개정법안은 같은 해 3월 8일 수요일 오전 10시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다.
이효상 의장의 개회 선언에 이어 재정경제위원회 간사인 오상직 의원이 나와 심사보고를 했다.
“개정안은 연구소 사업계획서에 대한 정부 승인 대신 연간 사업계획서를 보고로 대체하고 연구소에 대한 회계감사 대신 사업계획 집행실적을 보고하며, 정부가 지정하는 공인회계사 감사를 받아 그 결산서를 제출토록 했습니다. 국유재산의 무상 대부 외에 양여할 수 있도록 규정했습니다. 한·미 양국 공동사업으로 추진하는 연구소가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보해 한국과학기술의 총 센터가 될 수 있도록 개정법률안을 통과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시행 전 재개정이라는 곡절 끝에 육성법안은 이날 본회의를 통과했다. 정부는 이 법안을 1967년 3월 30일 공포번호 1917호로 공포했다. 이 육성법은 연구소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키는 든든한 수문장이었다. 연구소는 이로 인해 한국 과학기술계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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