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다음에는 중국이 반도체 공급망 정보를 내놓으라고 할 수도 있지요. 그 뒤에는 어떻겠습니까. 대만, 일본, 유럽도 기밀 정보 요구 명분이 있게 되는 겁니다. 우리 정부도 인텔, TSMC, 마이크론에 이러한 요구를 할 수 있을까요?”
미국 상무부가 반도체 공급망 정보 제공을 요구하자 업계에서 나온 목소리다. 미국은 반도체 공급망의 투명성 확보를 위한 것이라며 정보 제공 여부를 기업 자율에 맡긴다고 했다. 그러나 기업이 무겁게 받아들였다. “'큰형님'격인 미국의 요청인데 무시하기에는 부담입니다.” “최소한의 성의 표시는 해야겠지요.” 정보 제출을 꺼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하소연이 잇따랐다.
결국 미국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TSMC 등을 포함한 세계 유수의 반도체 기업 189곳에서 반도체 공급망 정보를 얻었다. 고객사를 포함한 영업 비밀은 대부분 제공하지 않았다고 한다. 관건은 핵심이 빠진 정보를 미국이 만족하느냐는 것이다. 상자를 열었는데 아무것도 없다면 공급망 투명성 확보라는 명분마저 잃을 수 있다.
미국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다. 시장 경제 메커니즘을 신뢰하고 이쯤에서 만족하는 것과 안보를 위협한다는 또 다른 논리를 앞세워 국방물자생산법(DPA)을 발동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얻은 것은 크게 없지만 더 이상 시장을 위협하지 않는다. 기업이 환영할 선택이다. 문제는 다음 단계인 강제 이행 조치다. 만족할 만한 수준의 정보를 얻을 때까지 세계 반도체 기업을 압박할 가능성도 여전히 있다.
그러나 미국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안 된다. 다른 국가들도 자국 안보를 앞세워 반도체 기업을 옥죌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했는데 왜 우리는 못해'라는 정서가 확산되면 일본, 유럽 등 전 지구적으로 '공급망 정보 요청 릴레이'가 이뤄질 수 있다. 가뜩이나 미국 견제로 반도체 굴기의 꿈이 흔들리는 중국에도 좋은 명분을 던져 줄 수 있다.
이렇게 가면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사업할 때 핵심 정보를 열어 둔다면 기업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누가 기술 개발에 열정을 쏟을 것이며, 어디에 전략 투자를 할 것인가. 이는 산업에도 시장에도 치명타다. 미국이 다음 단계로 간다면 악몽이 시작된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
-
권동준 기자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