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288>포연(砲煙)이 가신 뒤에

'더 씬 레드 라인'(The Thin red line). 과달카날 전투를 다룬 1998년 개봉작이다. 비슷할 때 개봉된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밀려 흥행은 그만 못했다. 다소 호불호가 갈렸지만 그만한 호평도 받았다. 내용만큼 이 제목의 의미를 두고도 여러 설이 있었다. 중평은 크림 전쟁 당시 한 전투로 거슬러 올라간다.

1854년 10월 발라클라바(Balaclava)에서 영국군 제93연대는 붉은 군복 차림을 하고 2열로 길게 늘어섰다. 이 진열을 향해 러시아 기병대가 돌진해 들어온다. 포연이 가득한 전장에서 23연대는 이 두 줄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버틴다. 이 기사를 송고한 누군가 이렇게 썼다. “가는 레드라인(붉은선)은 마치 강철을 덧씌운 듯 했다.”

조금의 차이가 큰 결과 차이로 나타난 사례는 많다. 혁신에서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차이를 만들었는지 속단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그러나 포연이 가신 후에 그 이유는 조금씩 드러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교훈으로 남는다.

2004년 유나이티드항공은 사우스웨스트 같은 저가 항공사에 반격이 필요했다. 자신의 저가 브랜드를 내놓는다. 이름은 테드(Ted)라고 지었다. “테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겁니다.”

그러나 이 시도는 고작 5년 만에 종지부를 찍는다. 훗날 따져본 원인은 허망한 수준이었다. 테드는 뭔가 달랐지만 단지 모기업과 다른 게 달랐을 뿐이었다. 기존 저가 항공사의 서비스와 비교해 차별점은 별반 보이지 않았다. 운임도 단지 자신의 원조에 비해선 저렴했지만 경쟁사보다는 15%나 높았다. 고객들에게 환영받지 못한 채 끝날 운명인 셈이었다.

[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288>포연(砲煙)이 가신 뒤에

2000년 호주 콴타스(Qantas) 항공도 비슷한 상황에 부닥친다. 저가 항공인 버진블루에 승객을 뺏기고 있었다. 경영진은 숙고 끝에 우선 버진블루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부터 뜯어보기로 한다.

눈에 띄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버진블루는 노 프릴(no-frills)이 아니라 부가서비스를 일부 남겨둔 로 프릴(low-frills) 전략을 택하고 있었다. 콴타스는 이것까지 없애는 노 프릴을 가정하고 시뮬레이션을 해본다. 놀랍게도 버진블루보다 가격을 20%나 더 깎을 수 있었다.

전략이 서자 경영진은 조용히 세 가지를 실행한다. 하나는 고객 피드백을 받아본다. 그다음 정작 자기 자신의 닮은꼴이 아닌지 본다. 셋째로 경쟁 서비스에 매몰돼 닮아 간 것은 아닌지 본다.

이 진단을 통과하자 2004년 비행기 14대로 14개 노선에 전격 취항한다. 제트스타(Jetstar)란 사명에 걸맞은 반격이었다. 거기다 제트스타는 콴타스가 경쟁력을 잃어 가던 노선에 투입된다. 저가인 탓에 매출은 예전만 못했지만 수익은 전성기 콴타스 못지않았다. 거기다 콴타스가 서비스를 보장한다는 홍보는 고객들에겐 콴타스를 싸게 이용한다는 느낌을 줬다.

성공은 제트블루만의 것이 아니었다. 콴타스는 온전히 자신의 초점에 집중할 수 있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제트블루는 5년 만에 시장의 22%를 차지했다. 콴타스 수익은 3억달러나 증가했고, 버진블루의 시장점유율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선다.

1854년 10월 25일 발라클라바에서 23연대는 보통의 4열로 서는 대신 2열로 더 길게 능선을 버티고 선다. 훗날 육군 원수가 되는 부대장 콜린 캠벨(Colin Campbell)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포연이 전장에서 가실 즈음 그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한다.

[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288>포연(砲煙)이 가신 뒤에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