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버나 데이터센터에 사용되는 고성능 반도체 인쇄회로기판(PCB) 수요가 폭증하고 있다. 반도체 기판은 반도체와 전자 부품을 메인 보드와 연결하는 부품이다. IT 기기에 필수로 들어간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가트너는 반도체나 패키지보다 반도체 기판 수요가 최근 2배 이상 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비대면 트렌드가 확산하면서 IT 수요가 증가했고, 특히 공급이 제한적인 고성능 반도체 기판 플립칩-볼 그리드 어레이(FC-BGA) 품귀 현상이 두드러졌다.
서버용 기판은 면적이 넓어져야 하고 최근 단일 칩보다는 시스템인 패키지(SiP)나 2.5차원 형태의 패키지가 증가하다 보니 기판 수요도 늘었다. 급증하는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삼성전기, 대덕전자, 코리아써키트, 심텍 등 주요 PCB 업체들은 일제히 고성능 PCB 대규모 투자에 나섰다.
이들 업체가 FC-BGA에 투자할 것으로 예측되는 총금액이 수조원을 웃돈다. LG이노텍도 FC-BGA에 대규모 투자를 검토 중이다.
매해 일정한 수요를 유지했던 기판 시장에서 조 단위 투자가 일어난 것은 드문 일이다. 기판업체들의 대단위 투자는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공급계약을 염두에 둔 투자여서 당장 후방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력도 긍정적이다.
◇ 반도체 업계 '뜨거운 감자' FC-BGA
반도체 칩과 기판을 연결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와이어(선)를 이용해 반도체와 기판을 연결하는 방식과 볼 형태의 범프로 연결하는 플립칩 방식(Flip Chip, FC)이다. 최근 나오는 고성능 반도체 대부분은 플립칩 방식을 이용한다.
플립칩 방식은 크게 FC-CSP와 FC-BGA로 구분된다. FC-CSP는 칩과 기판 크기가 같아 스마트폰과 같은 작은 모바일 기기에 탑재된다. FC-BGA는 칩보다 기판 크기가 커서 서버, 노트북, 전장 등에 탑재된다. FC-BGA는 가격이 높고 AI나 서버, 자율주행 등 고성능, 고스펙을 요구하는 고부가가치 제품에 주로 탑재된다.
FC-BGA는 기술 진입 장벽이 상당히 높다. 공급사도 상당히 제한적이어서 품귀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FC-BGA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대부분 일본 회사가 차지한다. 일본 이비덴, 신코 등이 대표 기업이다.
삼성전기, 대덕전자, 코리아써키트, 심텍 등 우리 기업들이 FC-BGA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 것은 당분간 이 시장이 계속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기 때문이다. 올해 FC-BGA 단가도 20~30% 이상 치솟았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인텔, AMD, 엔비디아와 같은 반도체 기업뿐만 아니라 구글, 바이두, 테슬라, 페이스북 등 글로벌 빅테크도 자체 반도체를 설계하면서 직접 기판을 구매하는 사례도 증가했다.
중저가형 PCB 시장은 이미 중국 업체들이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시장을 잠식했다. 국내 기업들은 기술 장벽이 높은 프리미엄급 PCB 시장을 개척해 차별화한 경쟁력을 이어갈 것이란 전략이다. 최근 국내 PCB 시장은 이미 고부가가치 FC-BGA 등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 고사양 반도체 기판에 기업들 '조 단위' 투자 러시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기, LG이노텍, 대덕전자, 코리아써키트, 심텍 등 국내 주요 PCB 업체들은 고성능 반도체 기판 생산을 위해 대단위 투자를 최종 검토 중이거나 확정했다.
가장 많은 금액을 투자하는 기업은 삼성전기다. 삼성전기는 반도체 기판 증설에 1조원 규모를 투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투자는 FC-BGA에 집중될 전망이다. 삼성전기는 국내 업체 중 FC-BGA 시장 점유율이 가장 높다.
대덕전자는 내년까지 FC-BGA 증설에 4000억원을 투자할 것이라고 최근 밝혔다. 코리아써키트도 최근 글로벌 통신 칩 제조사와 FC-BGA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심텍도 FC-BGA 생산 설비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고성능 PCB 수요가 급증하다보니 인텔, AMD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은 국내 기업에 생산라인 투자를 잇달아 제안하고 있다. 우리 기업들이 대규모 증설 투자에 나선 것도 수요처의 선투자나 부품 공급계약을 염두에 뒀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금까지 FC-BGA 시장은 일본, 대만 업체들이 주도했다. 그러나 최근 한국 업체들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고성능 기판 후방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도 긍정적이다. 기판 부품이나 소재 등을 공급하는 한국 업체들이 수혜를 입을 전망이다.
업계는 유례없는 기판 시장 '조 단위' 투자 러시가 반갑지만 전문 인력 부족을 우려하기도 한다.
국내 부품 업계 관계자는 “국내 PCB 업체들이 일제히 고성능 PCB 대규모 투자에 나서면서 업계는 모처럼 활기를 띠고 있다”면서 “그러나 전문 개발과 생산 인력이 부족해 당분간 시장에선 다소 혼란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박소라기자 sr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