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1·12대 대통령인 전두환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군부독재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무자비한 독재권력을 휘두르며 정치·사회 부문에서 큰 과오를 남겼다. 그러나 경제부문에선 경제 전문가를 주요 보직에 배치해 당시 국제적 경제 호황을 놓치지 않았다.
◇군부독재 상징
전 씨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육사 생도들을 동원해 군부 지지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 일로 박정희 전 대통령 신임을 얻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으로 발탁되며 권력에 발을 들였다. 노태우 등 육사 11기 동기를 주축으로 사조직 '하나회'를 결성,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호를 받으며 승승장구, 1979년 3월 국군 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됐다.
10·26 사건 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뒤 하나회를 통해 정권 찬탈을 위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사 반란을 통해 정국을 장악한 전 씨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1980년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는 민주화 열풍을 짓밟았고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했다.
같은 해 9월 1일 이른바 '체육관선거'라는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선거를 통해 결국 11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독재를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대통령선거인단 간접선거를 통해 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 요구를 거부했으나 6월 민주항쟁까지 이어지자, 결국 항복 선언을 하고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직선제 개헌을 명시한 6·29 선언을 발표했다.
퇴임 뒤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1988년 재산 헌납을 선언하고 백담사에 칩거했다. 그러나 재산 헌납은 이행되지 않았다.
전 씨는 1996년 내란, 내란목적살인죄, 뇌물 수수 등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추징금 2205억원이 선고됐다. 수감 2년 만인 1997년 12월 22일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숨질 때까지 5·18민주화운동 유혈진압에 대한 사과를 남기지 않았다. 추징금 2205억원에 대한 완납도 이뤄지지 않았다. 전 재산이 '29만원'이라고 주장했다.
◇3저 호황·경제 성장
전 씨는 정치·사회적 과오와 달리 경제 부문에서는 3저 호황(원유가격 하락·달러 가치 하락·국제금리 하락)을 발판으로 높은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재익·사공일 청와대 경제수석 등 경제 관료에 전권을 위임한 것도 눈에 띈다.
당시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역할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며 전권을 맡겼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김재익 수석은 고도압축성장을 '안정성장'으로 바꾸는 경제정책의 기조전환을 역설한 인물이다.
대통령 집권기간 연평균 성장률은 9.3%로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높았다. 집권 첫 해 1980년 1714달러였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도 집권 마지막 해인 1988년 4754달러로 2.8배로 늘었다.
만성적 무역적자도 흑자 구조로 바뀌었다. 중산층도 두터워졌다. 부가가치가 높은 자동차·전자·반도체 같은 첨단산업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를 통해 세계에 대한민국을 알린 공도 있다.
정권 불만 세력에 대한 유화 정책 차원에서 야간통행 금지 조치 해제와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도 시행했다. 3S(스크린-영화·스포츠·섹스) 정책을 추진하며 프로야구·축구 등을 출범시켰고, 컬러방송 등도 시작했다.
안영국기자 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