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톡]신뢰 흔들린 조달행정

“수십억짜리 계약 건을 따냈다고 기뻐하고 있었는데 두 시간 만에 문자로 취소 통보를 받았습니다. 자신들이 실수해 놓고 법적인 문제가 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무책임한 행정이 과연 기업에 신뢰를 줄 수 있을까요?” 최근 조달청 입찰 공고에 참여해 계약 1순위 업체로 선정됐지만 곧바로 취소 통보를 받은 한 기업인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던진 뼈아픈 말이다.

광주지방조달청은 지난달 '서해지방해양경찰청 경비함정 레이다(SSPA) 구매·교체 설치' 입찰공고를 진행했다. 기업은 공고 내용을 바탕으로 입찰에 참여했고, 개찰에 따라 계약 순위 발표까지 이뤄졌다. 그러나 해당 입찰 공고는 개찰이 이뤄진 지 얼마되지 않아 행정 오류를 이유로 재공고 결정이 이뤄졌다.

적격 심사 때 공급자 확약서나 보증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공고 내용이 공정경쟁 원칙에 어긋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당시 1순위를 받은 기업은 즉각 항의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법적인 문제가 없다'가 전부였다. 조달청 입장에서는 오류가 발견된 계약 건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중요한 정부 계약 건에 실수가 발생했다는 것부터가 그동안 쌓아 온 조달행정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다.

취재 과정에서 더 큰 문제도 발견했다. 비슷한 사업이 다른 지방청에서도 입찰 공고가 진행됐는데 공정경쟁 원칙에 어긋난다던 공급자 확약서나 보증서 제출 내용이 그대로 반영돼 있었다. 강원지방조달청은 이미 1순위 업체와 계약까지 완료한 상태였다. 조달청은 물품마다 적용되는 규정이 복잡해 담당자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은 같은 물품이라 해도 담당자가 누구냐에 따라 다른 입찰 공고 내용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전체 입찰 공고 내용이 모니터링되지 않았으며, 지방청별 소통도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해당 건에 대한 입찰 공고를 진행한 지방청 담당자는 한목소리로 '다른 지방청 일은 모른다, 우리는 문제가 없다고 본다'는 식의 대답뿐이었다. 입찰 공고에 오류가 발견되더라도 각 지방청에는 이러한 내용을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 현재 재공고 조치된 입찰 공고는 잠시 중단된 상태다. 1순위 기업의 억울함이 없도록 하겠다며 본청 차원에서 재검토가 이뤄지고 있다.

만약 기업의 억울함이 인정돼 계약이 정상으로 진행된다 하더라도 조달청은 어떠한 오류가 있었는지 분명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지역별 모니터링, 소통 시스템 구축 등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도 수립해야 한다. 국가 조달업무는 신뢰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공든 탑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각오로 흔들린 조달행정의 신뢰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대전=양승민기자 sm104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