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 학교 앞 문방구는 손바닥 만한 크기로 조잡하게 제본한 '드래곤볼' 해적판 만화책을 500원에 팔았다. 당시 500원은 달고나를 무려 10개나 사먹을 수 있는 큰돈이었다. 그런데도 드래곤볼은 구매할 가치가 있었다. 인기가 높았던 '핫 콘텐츠'였던 데다 무엇보다 등장 캐릭터와 필살기를 모르면 또래와 어울리기 어려웠다.
한국 초딩을 단숨에 매료시킨 드래곤볼은 미국, 유럽 등 세계 각국에서도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2020년 기준 세계에 누적 2억6000만부를 판매하며 일본 망가(만화) 산업의 글로벌화를 이끌었다.
지난해 초대박을 터뜨린 '오징어게임'은 글로벌 콘텐츠 시장을 강타했다. 한국만의 정서를 담은 차별화한 작품성과 탄탄한 구성으로 이목을 끌었다. 세계 각국 차트에서 장기간 상위권에 오르며 'K-콘텐츠' 붐을 일으켰다. 오징어게임이 콘텐츠 시장에서 드래곤볼 못지않은 위력을 보인 것이다.
일본 경제학자 노구치 유키오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는 최근 격주간 경제전문지 다이아몬드 온라인판에 일본이 선진국 대열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기고문을 게재했다. 1990년대 중반의 거품경제 붕괴 이후 경제침체가 지속된 일본과 달리 경쟁국들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빠르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2020년 기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 평균을 1로 보면 일본의 1인당 GDP는 0.939 수준이다. 노구치 명예교수는 일본의 경제침체가 지속되면 2030년께 OECD 평균의 절반 수준까지 하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1973년 OECD 평균의 10.4%에 불과했던 한국의 1인당 GDP가 OECD 평균에 근접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의 노동생산성은 OECD 회원국 평균 대비 13% 정도 낮다”면서 “상상도 하기 싫지만 일본이 G7 회원국에서 탈락하고 그 자리에 한국이 들어가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라며 높은 위기감을 내비쳤다.
일본 내에서 자국의 추락과 한국 급성장을 조명하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오히려 우리나라에는 여전히 일본을 따라잡을 수 없는 존재로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일 양국을 비교하는 기사에는 일본을 높이고 한국을 평가절하하는 댓글이 꽤 달린다. 손오공처럼 주황색 도복을 차려 입고 에너지파를 쏘는 자세를 흉내 내던 드래곤볼 시대는 지났다. 글로벌 시청자 가슴과 등에 번호를 적은 초록색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즐기고 있다. 이제는 만물 일본우월주의에서 벗어나 잠깐의 '국뽕'을 맛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윤희석기자 pionee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