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배터리 등 첨단기술 산업이 국가전략산업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반도체는 무역 분쟁과 전쟁 억지 수단으로 동원될 만큼 그 중요성이 급부상했다.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할 핵심 산업이 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는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산업과 궤를 같이해야 탄탄한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반도체·디스플레이 강국이라고 하지만 공급망 등 생태계는 여전히 취약하다. 2019년 일본의 첨단 소재 수출 규제에 대응, 상당한 국산화 성과를 거뒀다지만 갈길은 멀다. 글로벌 소부장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국산화 사각지대를 재점검하고 강력한 산업 지원으로 진정한 '기술 독립'을 이끌어 내야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기술 독립, 연구개발(R&D) 지원으로 풀어야
지난해 국내 반도체 제조사 투자는 사상 최대 규모였다. 반도체 공급난과 맞물려 수요가 급증, 시장이 대폭 성장했다. 반도체 설비 투자의 핵심이 되는 장비 시장도 호황이었지만 국내 기업 수혜는 해외와 견줘 미약했다. 반도체 첨단 공정 장비의 낮은 국산화율 탓이다.
국내 반도체 장비 국산화는 20~30% 수준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핵심 공정인 식각·증착 등 국산화 범위를 확대하고 있지만 전체 비중은 크지 않다. 해외 의존도가 높다는 의미다. 메모리 중심으로 성장한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 특성상 파운드리(시스템 반도체)용 장비 시장은 걸음마 단계다. 성장 잠재력이 높은 파운드리 공정은 외국계 기업인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ASML, 도쿄일렉트론(TEL), 램리서치, KLA 등이 주도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내 반도체 설비 투자가 늘어날수록 수입에 의존하게 된다. 관세청 수출입무역통계에 따르면, 작년 반도체 장비(HS코드) 무역수지는 134억달러(약 16조5000억원) 적자다. 전년(84억달러, 약 10조3000억원) 대비 적자폭은 59% 증가했다.
일본의 수출 규제 이후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국산화 성공 사례가 잇따라 들린다. 그러나 여전히 시장에 공급되는 핵심 소재는 일본 의존도가 높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업체도 국산 소재 비중을 높이려고 하지만 아직까지 물성과 양산 능력이 일본을 앞서긴 어렵다는 평가다. 첨단 소재는 일본, 기타 원자재는 중국 수입 의존도가 높은 것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소부장 기술 독립은 적극적 R&D로만 풀 수 있다. 국내 소부장 기업이 대부분 중소·중견기업이다보니 막대한 R&D 비용을 감당하기 힘든 실정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반도체 소부장 공급망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국산화”라면서 “국가 차원 R&D 지원이 뒷받침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새 정부에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공약으로 내세운 중견기업 R&D 세액 공제 25% 확대처럼 소부장 기업을 위한 전방위 R&D 지원 정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국내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처럼 소부장 최종 고객사가 있는 만큼 국산화를 위한 기업 간 협력 생태계를 보다 강화할 정책도 요구된다.
◇민간 투자 활로 열 제도 개선 시급
반도체를 전략 무기화해 안정적 공급망을 확보하려는 국가별 행보가 빨라졌다. 특히 미국의 움직임이 남다르다. 미국은 자국 내 반도체 생산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반도체생산촉진법안(칩스포아메리카)'을 마련, 의회 통과를 준비 중이다. 미국에 반도체 설비 투자할 경우 최대 40% 강력한 세액 공제안을 담았다. 미국의 유인책에 우리나라 삼성전자와 TSMC도 미국 내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기로 했다.
우리나라도 올해 초 우여곡절 끝에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법(반도체특별법)'을 통과시켰다. 국내 시설 투자에 대한 세액 공제는 최대 20% 수준이다. 업계에서는 해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한 반도체 제조업체 관계자는 “낮은 세제 지원 혜택뿐 아니라 각종 환경 규제가 해소되지 않아 국내 반도체 제조와 관련 소부장 생산 시설을 구축하는 것이 여전히 어렵다”면서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전략 산업 생산 거점의 해외 유출을 막기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업계 의견을 충분히 반영한 반도체특별법을 개선해야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 당선인은 공약으로 경기 평택과 이천 중심 반도체 생산 거점을 용인과 안성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광주에 차량용 전력 반도체 클러스터를 마련할 계획이다. 그러나 제도적 한계로 반도체 생산 거점을 확대할 동력이 힘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기업의 막대한 투자 유인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대규모 생산시설 구축을 가로막는 각종 규제를 해소, 신속한 투자가 가능한 환경도 조성해야 한다. 새 정부에서 풀어야 할 숙제다.
◇디스플레이 “국가첨단기술에 포함”… 배터리 “기술 유출 대책 마련”
우리나라는 디스플레이 강국이다. 그러나 최근 중국으로부터 LCD 시장 주도권을 빼앗겼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등 첨단 디스플레이 기술과 산업도 위협받는 상황이다. 반도체처럼 디스플레이를 국가첨단전략산업 특별법과 조세특례제한 내 국가 전략기술에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 때문에 디스플레이는 반도체 대비 R&D와 특화 단지 인허가, 시설 투자에 대한 세제 지원 사각지대에 빠질 수 있다. 우리 디스플레이 기술을 보호하고 경쟁력을 강화할 국가 차원 제도가 미흡하다는 이야기다.
업계에서는 디스플레이를 국가첨단 전략기술로 규정하고 산업을 육성할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고성능 AMOLED △마이크로 LED △나노 디스플레이(나노 미립자 발광소자) △친환경 QD 디스플레이 패널·소재 개발 등 미래 먹거리가 될 기술을 보다 시급하게 국가첨단전략기술 울타리에 편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디스플레이 초격차를 유지하고 후발주자 추격을 따돌려 국가 핵심 산업으로 지속 성장할 환경을 주문한다.
이동욱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 상근 부회장은 “최근 글로벌 수요 불확실성이 커지고 중국 OLED 추격이 가속화되고 있다”면서 “국내 패널 기업의 대규모 투자 유도를 위해 국가첨단전략기술에 디스플레이가 포함되도록 정부의 적극적 지원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배터리 업계와 완성차 업체 간 합작공장이나 조인트벤처(JV)를 설립하는 사례가 늘었다. 한국 배터리 산업의 핵심기술 유출 우려도 함께 제기된다. 중국·유럽 신규 배터리 업체가 생겨나면서 국내 배터리 업계의 기술 인력이 이동하는 일도 적지 않다.
정부는 지난해 7월 배터리 밀도와 생산, 제작 등에 관한 기술을 국가 핵심기술로 지정했다. 올해 초 국무회의에서 이차전지 산업 등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첨단전략산업 특별법'을 의결했다. 그러나 세계 최고 수준의 한국 배터리 기술을 탐내는 외부 공격을 버텨내기 힘들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배터리 출력과 관련한 실험 데이터 등이 대표적이다. 중요도가 커도 국내 관련법 테두리에서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얘기다.
업계는 배터리 핵심 기술의 체계적 보호와 유출을 막을 범정부적 차원 대응책을 요구한다. 관리 감독 기능 강화뿐 아니라 기술 유출 모니터링과 전문적 기술 판단 능력, 유출에 따른 빠른 대응력 등 체계화가 필요하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 김지웅기자 jw0316@etnews.com, 박태준기자 gaius@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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