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메타버스 시대의 필수품 '슈퍼컴퓨터'

<이진용 코오롱베니트 대표이사>
<이진용 코오롱베니트 대표이사>

2032년 출근길에 나선 A씨. 급한 마음에 무언가 집에 두고 온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신형 '스마트글라스'다. 스마트폰을 챙기지 않은 적은 있지만 스마트글라스는 생활필수품이 된 지 오래다. 스마트글라스를 착용하자 회사까지 최단의 교통정보가 펼쳐진다. 평소라면 드론 택시가 빠르지만 기상정보까지 분석한 AI가 곧 비가 올 것이라며 자율주행버스를 추천한다. 버스에 오르니 맞춤형 뉴스가 영상으로 상영된다. 어제 과식한 나를 위해 회사 근처 식당의 가벼운 건강식 음식을 점심으로 추천한다. 회사를 들어서며 그 식당을 스마트글라스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예약을 마쳤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스마트글라스를 통해 잠시 후 고객과 협의할 제품을 AR(증강현실)로 살펴본다. 어제는 VR(가상현실)로 미리 체험도 해 봐서 오전 미팅을 차질 없이 마칠 수 있을 것 같다.

[ET시론] 메타버스 시대의 필수품 '슈퍼컴퓨터'

'메타버스'가 일상화된 세상을 그려 본 것이다. 현실에서 이런 광경을 언제쯤 볼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은 여전하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세상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데이터와 이를 처리하는 빠른 연산 능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2032년의 A씨에게 제공된 정보 역시 모두 거대한 빅데이터다. AI와 같은 빠른 분석은 기본이고, AR·VR·자율주행 등 기술과도 실시간으로 상호 작용해서 경험자에게 제공해야 한다. 이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빨리 갖출수록 메타버스 시대가 앞당겨지는 셈이다.

결국 메타버스 라이프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기술은 엄청난 크기의 데이터를 빠르게 연산 처리할 수 있는 컴퓨팅 파워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초고성능컴퓨터, 일명 '슈퍼컴퓨터'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슈퍼컴퓨터는 새로운 기술이 아니다. 일반 컴퓨터에 비해 훨씬 빠른 속도로 대용량의 연산을 수행할 수 있는 컴퓨터를 통칭한다. 1985년 미국 크레이(CRAY)사를 통해 대중에 처음 알려진 이후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최근의 GPU(Graphic Processing Unit) 기술 발전에 힘입어 기존 CPU 기반에 비해 GPU 기반 슈퍼컴퓨터 성능이 크게 증폭되면서 다시 한번 커다란 진화를 예고하고 있다.

지금까지 슈퍼컴퓨터는 주로 학술 연구 영역에 활용돼 왔다. 수만 가지의 시나리오를 조합해서 기상정보를 제공하거나 자연재해 예측에 사용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우주·항공·군사 분야의 시뮬레이션에도 슈퍼컴퓨터의 연산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의료·보건 분야에서는 수년간의 연구 과정을 수분 안으로 단축시킨다. 코로나19 치료제 개발을 위해 수년이 필요했던 단백질 구조 예측 연구에도 적용된 바 있다.

하지만 메타버스 시대를 앞둔 지금 슈퍼컴퓨터의 상업적 활용성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 디지털 트윈, AR, VR, 자율주행 등과 같은 다양한 기술과의 복합적인 연산 처리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제 슈퍼컴퓨터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견인할 인프라로 인식되고 있다.

세계적인 '슈퍼컴퓨터' 개발 경쟁도 이와 무관치 않다. 최근까지 글로벌 성능 1위 슈퍼컴퓨터로 알려진 일본의 '후가쿠'는 1초에 44경번에 달하는 처리 속도를 자랑한다. 최근 엔비디아가 공개한 슈퍼컴퓨터 '에오스'(EOS)는 1초에 1840경번에 달하는 연산이 가능하다고 알려졌다. 메타(옛 페이스북)는 올해 초 1초에 500경번의 연산 처리가 가능한 슈퍼컴퓨터를 개발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슈퍼컴퓨터 기술 경쟁은 국가 간 패권 경쟁 양상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 인프라로 부각됨에 따라 주요 선진국들은 슈퍼컴퓨터에 매년 조 단위의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기술 개발에서부터 응용 분야로의 활용까지 연계한 국가 차원의 전략 과제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우리나라 또한 '국가초고성능컴퓨터 혁신전략'을 중심으로 슈퍼컴퓨터 육성을 서둘러야 하는 시점이다. 특히 미-중 간 무역분쟁 제재 대상에 슈퍼컴퓨터가 포함된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외산 제품 중심의 국내 슈퍼컴퓨터 시장을 국산 제품 중심으로 변화를 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유기적인 산·학·연 협력과 함께 범정부적인 투자와 활용 생태계 구축이 뒷받침돼야 할 것이다.

슈퍼컴퓨터는 4차 산업혁명을 위한 핵심 자산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대용량 데이터의 고속 연산이 필수적인 메타버스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당장은 규모와 가격 면에서 합리적인 고성능급 컴퓨터(HPC; High Performance Computer)가 훌륭한 대안이 되고 있지만 미래에는 모든 기업들이 슈퍼컴퓨터를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스마트폰이 현대인의 생활에 필수품이 되었듯이 메타버스 시대 기업에 슈퍼컴퓨터가 필수품이 될 것이라는 상상은 무리가 아니다.

이진용 코오롱베니트 대표이사 leej@kolon.com

◇필자 소개=이진용 코오롱베니트 대표이사는 30여년을 코오롱그룹에서 근무하고 있다. 1989년 ㈜코오롱에 입사해 2000년 코오롱인베스트먼트 대표이사를 지냈다. 이후 2007년 코오롱그룹 회장 비서실장, 2011년 ㈜코오롱 윤리경영실장, 2013년 ㈜코오롱 경영혁신실장을 역임했다. 2015년에는 코오롱그룹 핵심 계열사인 코오롱인더스트리에서 경영지원본부장직을 맡았고, 2017년에 코오롱베니트 대표이사에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