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톡]무언의 종군기자

러시아가 지난 2월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했다.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특별 군사작전'을 실시한다며 국제사회가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들었다. 러시아군은 개전 초기에 우크라이나의 주요 군사시설을 파괴하며 빠르게 수도 키이우를 향해 진군했다. 속전속결로 우크라이나를 장악하려 했던 러시아군의 전략은 한때 성공하는 듯했다. 서방의 지원을 등에 업은 우크라이나군은 끈질기게 저항하며 이들을 막아섰다. 예상치 못한 거센 반격에 밀린 러시아군은 전술상 후퇴를 선택, 현재 친러시아 세력이 장악한 북부 돈바스 지역에서 다시 한번 대대적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부차 등 러시아군이 퇴각한 도시의 모습을 사진·영상으로 공개하자 세계는 또 한 번 큰 충격에 빠졌다. 손과 발이 결박된 채로 숨진 민간인 복장의 시신 수백 구가 발견되면서 러시아군의 '제노사이드'(집단학살)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부는 이에 대해 우크라이나 정부가 서방 언론을 위해 조작한 것이라며 즉각 반박했다.

<AP=연합>
<AP=연합>

러시아의 반박에도 미국 위성업체 맥사 테크놀로지가 부차 지역의 고해상도 위성사진을 공개하면서 러시아군의 민간인 학살 자행 가능성에 무게가 실렸다. 러시아군이 부차를 점령하고 있던 지난달 19일 사진에는 거리에 방치된 시신 모습이 그대로 담겼다. 뉴욕타임스(NYT)는 해당 사진을 분석해서 시신 대부분이 러시아군이 도시를 장악하고 있던 3주 전에 사망했다고 전했다. 위성이라는 첨단 정보기술(IT)이 러시아의 전쟁범죄 정황을 찾아낸 셈이다.

미국 방송사 CNN은 지난 1991년 걸프전에서 사상 처음으로 전쟁을 생중계했다. 당시 유혈이 낭자한 거리 등 전쟁의 참상을 TV로 시청한 세계 각국은 큰 충격을 받았다. 걸프전 이후 30년이 지난 현재 TV는 물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비롯한 각종 온라인 플랫폼으로 전쟁 상황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러시아군의 폭격 장면을 스트리밍 영상으로, 항전하는 우크라이나군을 인스타그램에서 볼 수 있는 시대다.

러시아는 현재까지 불거진 모든 전쟁범죄 의혹에 우크라이나 정부와 서방 언론의 조작이라면서 완강히 부정하고 있다. 7일(현지시간) 어린이 5명을 포함해 300여명의 민간인 사상자를 낸 기차역 공격도 우크라이나의 인간방패 전술이라고 주장했다. 8일에는 자국의 전쟁범죄 혐의를 비판하는 15개 국제 인권단체, 외국 비정부기구(NGO)를 러시아에서 무더기 퇴출했다.

러시아는 세계가 IT라는 무언의 종군기자를 통해 이번 전쟁을 실시간으로 목도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해선 안 된다. IT가 남기고 있는 생생한 전쟁 기록은 러시아 다음 세대가 짊어져야 할 원죄로 이어질 수 있다. 러시아가 비인도적 폭력 행위를 멈추고 평화를 위한 합리적 결단을 내리기를 바란다.

윤희석기자 pionee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