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인 11일 집 이사를 끝낸 후 심한 몸살을 앓았다. 육체 노동보다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몸살의 원인으로 보인다. 세입자는 언제나 보증금을 안전하게, 제때 돌려받는 게 가장 큰 난관이다. 이번에도 집주인은 보증금을 돌려주기로 한 약속 날짜를 한참 미루다가 이사하는 날 오후 늦게 이체해 줬다. 이 일은 나비효과가 되어 그 뒤 일정들을 연속으로 꼬이게 했다.
요즘 은행 계좌에는 입금은 쉽지만 출금은 어렵다. 보이스피싱 방지 등 목적으로 '1일 이체 한도 제한'이나 '금융 거래 한도 계좌'에 걸려 있는 경우가 많다. 평소에는 큰 불편이 없지만 주택 등 부동산 구입이나 이사 등으로 큰돈이 들어갈 상황이 되면 매우 난감하다.
얼마 전에 꽤 큰 규모의 투자자금을 시중은행 계좌로 입금했다가 고생한 기억이 떠올랐다. 계좌에서 인출 가능한 금액은 100만원으로 제한돼 있어 전액을 인출하려면 하루에 한 번씩 반복 작업을 해야 했다. 레버리지를 끌어올려서 한 투자였기 때문에 인출하지 못한 남은 잔액에 대해 매일매일 이자도 물어야 했다.
해당 은행의 오프라인 지점을 찾아가 읍소해도 창구 직원은 이체 한도를 풀어 주지 않았다. 통상 한도 계좌를 해제하려면 3개월 이상의 급여 이체 기록과 재직증명서를 제출하거나 은행 계열 카드사의 신용카드 결제 대금 납부 실적이 있어야 한다. 이마저도 은행마다 달라서 고객은 요구 조건을 미리 준비하기도 쉽지 않다. 내 돈이 눈앞에 있는데도 은행 계열의 신용카드가 없다면 3개월 동안은 돈을 꺼내 갈 방법이 없는 것이다.
지난 경험을 되살려 철저히 대비했지만 이번에도 소용이 없었다. 주거래은행의 이체 한도를 미리 늘려 놓았지만 정작 전셋돈은 엉뚱하게도 다른 은행의 내 계좌로 입금됐기 때문이다.
이삿짐을 트럭에서 내리고 있는데 관리사무소는 잔금 이체 없이는 집 열쇠를 내줄 수 없다고 했다. 관리사무소 직원은 잠시 후 퇴근이라며 서두를 것을 촉구했지만 억 단위의 보증금을 10분 이내에 융통할 방법이 도저히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돈도 있고 집도 있는데 졸지에 길거리 난민이 될 위기의 순간이었다.
일부 인터넷전문은행은 이와 같은 처지의 고객들을 돕기 위해 '임시증액'이라는 서비스를 지원한다. 비대면으로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하루 동안 이체 한도를 필요한 만큼 높여 주는 제도다. 실물 신분증을 갖고 있어야 하고, 스마트폰 영상통화를 통해 여러 자세를 취하는 등 꽤 꼼꼼한 본인인증 과정이 수반된다. 관리사무소에 읍소하며 시간을 끌고, 그 사이 임시증액에 성공해서 잔금을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전통의 시중은행과 인터넷전문은행의 방향성 차이를 생각하게 한다. 금융은 안전과 원칙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업종이지만 원칙은 적극적 조치를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고객이 맡긴 돈에 대해서도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라는 의도가 서비스에 묻어난 것은 아닌지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이형두기자 dudu@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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