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을 대표하는 한 우익 신문사의 온라인 사이트에서 눈을 의심하게 하는 문장을 접했다. 한 기사 제목에 '용기 있는 한국인'이라는 표현이 있다. 평소 한국에 호의적이지 않은(실은 힐난에 가까운) 기사를 자주 게재하는 매체다. 이럴 리가 없다. 다시 한번 전체 문장을 살펴봤다. 전체 기사 제목은 '위안부상(소녀상) 철거를 세계에 호소하는 용기 있는 한국인들'이다. 그러면 그렇지. 실소가 나왔다. “반일 여론의 압도적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세계로 발신되기 시작했다.”
일본 우익 언론으로부터 이 같은 극찬을 받은 이들은 위안부 피해를 사기라고 주장하는 한 시민단체다. 이들은 지난 25일부터 독일 베를린 소녀상 앞에서 '위안부 사기 이제 그만'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원정 시위를 벌이고 있다. 현재 독일인은 물론 현지에 거주 중인 일본인까지 이들에 대항하기 위한 집회에 나서는 형국이다. 주객전도도 유분수다.
과거 일본 언론이 '용기 있는 한국인'으로 칭송한 또 다른 인물이 있다. 이수현 씨다.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2005년 1월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 취객을 구하려다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위안부 사기'를 주장하는 민간단체를 '용기 있는 한국인'이라 치켜세운 우익 신문사도 지난 2019년 특집기사에서 “한국인 유학생 한 명의 용기 있는 행동”이라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몸소 보여 준 인물”이라고 추모했다.
올해 5월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지난 정권에서 악화한 한·일 관계를 개선하는 데 의욕을 보이고 있다. 정치, 경제, 산업, 문화 등 모든 면에서 한국과 불가분 관계에 있는 일본과 대립하기보다 미래지향적 관계를 구축하겠다는 복안이다.
하지만 한·일 관계 개선에는 국민적 이해가 우선 조건이다. 정부 간 합의가 절대 양국의 국민 의식 개선을 뜻하는 건 아니다. 특히 일본과 관련한 처절하게 아픈 과거가 있는 한국인에게 위안부 피해를 사기라 주장하는 이들의 등장은 반일 감정을 증폭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수현씨의 의로운 희생은 한·일 관계가 경색·악화할 때마다 양국을 잇는 가교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현재 베를린 시위에 대한 한국의 여론은 '나라 망신'이라는 탄식이 대부분이다. 일각에서는 정부나 정치권이 이들을 제지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펼치고 있다.
물론 개인의 신념과 인식은 존중한다. 하지만 국민적 감정에 반하고 역사 인식에 무감한 행동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들이 앞으로 일본 우익 매체가 아니라 한국 국민으로부터 '용기 있는 한국인'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길을 걷기 바란다.
윤희석기자 pionee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