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이 바뀔 때마다 느껴지는 '데자뷔(deja vu)'가 있다. 바로 이전 정권 지우기다.
이전 정부가 했던 주요 사업을 없애고, 관련 예산을 삭감한다. 기존 정부에서 사용하던 용어는 암묵적인 금기어가 된다. 이명박 정부에서 강조했던 '녹색'이란 단어는 이후 정부에서는 쓰지 않는 말이 됐고, 박근혜 정부가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던 '창조경제' 역시 사라진 단어가 됐다. 문재인 정부에서 썼던 '소득주도 성장'이나 '한국판 뉴딜'은 앞으로 듣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정치적인 이유도 어느 정도 이해는 한다. 하지만 이전 정부의 일을 무리하게 없애는 과정에서 많은 부작용이 생긴다.
최근 정부는 내년 예산안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했다. 건전재정으로 전환하겠다는 기조 아래 긴축예산을 마련했다. 2010년 이후 처음으로 전년보다 예산안이 감소했다.
그런데 감소한 분야를 자세히보면 한국판 뉴딜이나 지역화폐 등 문재인 정부 역점사업 관련 예산이 많다. 중소벤처기업부 예산도 예외가 아니다. 모태펀드와 스마트공장 예산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내년 모태펀드 예산으로 3135억원을 책정했다. 2021년 7200억원, 올해 5200억원 대비 큰 폭으로 감소했다. 스마트공장 예산은 2000억원 이상 감액되며 1057억원이 배정됐다.
이전 정부와 정반대 행보다. 지난 정부에서는 모태펀드 예산을 늘리며 매년 사상 최대 규모 펀드 결정과 투자가 이뤄졌다. 그 결과 창업생태계가 탄탄해졌고 '제2벤처붐'이 일면서 유니콘기업 등 유망 기업이 많이 나왔다.
스마트공장은 박근혜 정부에서 시작해 문재인 정부로 이어지면서 올해까지 3만여개 기업이 지원을 받는다. 스마트공장을 구축한 기업은 생산성과 효율이 올라가고 불량과 안전사고는 줄어드는 효과가 나타났다.
업계는 모태펀드를 지속 확대해 글로벌 투자위기에 대응하고 스마트공장 지원을 지속해 중소 제조업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런데 정부 예산은 업계 목소리와 정반대로 책정됐다. 정부가 과연 정치적 판단을 배제하고도 모태펀드와 스마트공장 예산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시계를 몇 달 전으로 돌려보자.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모태펀드와 스마트공장 예산 확대를 주장했다. 당시 공약에서 창업 초기 정부 지원과 민간 투자 활성화를 위해 모태펀드 규모를 2배로 확대하겠다고 했다. 미래형 스마트공장 구축지원 및 예산 확대 역시 공약으로 약속했다.
그런데 정작 첫 예산안에서는 공약과 정반대 결과가 나왔다. 불과 몇 달 사이에 상황이 달라지진 않았다. 모태펀드와 스마트공장은 대선 이전에도 그리고 몇 달 지난 지금도 여전히 확대가 필요한 분야다.
이제 우리도 달라져야 한다. 5년마다 이전 정부 지우기를 반복하며 발생하는 부작용을 줄여야 한다. 이전 정부에서 시작한 일이라도 필요한 일이고, 성과가 좋은 일이면 지원을 이어가야 한다. 모태펀드는 한국 창업 생태계가 더 탄탄해지고 글로벌 유니콘 기업을 배출할 수 있도록 하는 마중물이다. 스마트공장 지원 예산은 우리 중소 제조기업의 경쟁력을 높여 글로벌 기업과 경쟁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반이다.
비록 이전 정부에서 시작한 일이라도 현 정부에서 이를 더욱 발전시킨다면 그것은 현 정부의 성과다. 그리고 그 성과에 따른 과실은 국민 모두의 몫이다.
이제는 5년마다 반복되는 데자뷔와 그 부작용을 그만 보고 싶다.
권건호기자 wingh1@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