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과 '354년.'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은 지난해 '기업 벤처링 트렌드와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5년 뒤 기업 평균 수명을 12년으로 전망했다. 1958년 61년 수준이었던 기업 수명은 대폭 감소한다는 것은 기업 입장에서는 두려운 일이다. 점차 성장 동력을 잃은 기업은 시장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백년 기업'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수많은 기업가의 꿈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기업이 지속 성장하려면 '백년대계'가 있어야 한다. 먼 미래를 바라본 장기 성장 전략이다. 단순 유지에만 급급해선 안 된다. 끊임없이 내일을 준비하고 새로운 먹거리를 발굴하며 혁신하지 않으면 기업으로서 존재 가치가 흔들린다.
치열한 기업 생존 시장에서 354년의 명맥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저 명맥만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속 성장이 가능하다면 그야말로 '불멸의 기업'으로 주목받을 것이다. '불멸의 기업'은 프리드리히 야콥 머크가 1668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다름슈타트에 있는 '천사약국'을 인수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한 머크그룹의 별칭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약·화학 회사'로도 유명한 머크는 이제 글로벌 '과학기술기업'으로 우뚝 섰다. 국내 시장에서는 머크 일렉트로닉스(전자재료 사업부문)를 중심으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를 공급하고 있다. '고객 가까이에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사업 전략에 따라 연구개발(R&D)부터 생산 공장까지 다수 사업장을 한국에 두고 있다. 한국머크는 지난해 말부터 2025년까지 6억유로(약 8000억원)를 투자,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사업을 강화하기로 했다. 머크 그룹 내 다른 사업부문으로는 라이프사이언스와 헬스케어가 있다.
전자신문은 창간 40주년을 맞아 머크 지분 70%를 소유한 지주회사 E. 머크 KG 회장이자 머크가(家)를 대표하는 협의체 '가족위원회(Family Board)' 회장을 맡은 프랑크 스탄겐베르그 하버캄 박사를 인터뷰했다. 인수합병 후 새로이 편입된 국내 주요 머크 사업장을 시찰하고 직원과 파트너를 만나기 위해 이달 방한한 하버캄 박사는 전자신문 창간 30주년(2012년)에도 본지와 인터뷰를 진행한 바 있다. 3세기 반을 넘게 기업을 유지해온 머크그룹의 경험과 노하우, 그리고 10년 사이 머크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들었다. 지면을 통해 독자들에게 머크 '350년 대계'를 공유한다.
-가족위원회 회장이자 머크의 지주회사 E. 머크 KG 회장직은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가. 간단히 소개해주길 바란다.
▲머크의 기업지배구조에 대해 소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E. 머크 KG와 가족위원회 회장 주요 역할은 머크 가문의 전반적인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이다. 그룹 전체 전략의 방향성과 경영 사안에 대한 조언을 맡고 있다. 일반 주주들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 우량주 세그먼트에 상장, 공개적으로 거래 중인 나머지(30%) 지분을 갖고 있다. E. 머크 KG는 회사경영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고 머크 그룹의 근본적인 기업운영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집중한다.
-머크의 가족 경영, 지배구조가 다소 복잡해 보인다. 가족위원회, 파트너위원회, 이사회 각각의 기능과 역할은 무엇인가.
▲E. 머크 KG에는 가족위원회와 파트너위원회가 있다. 이중 머크 가족대표로 구성된 E. 머크 KG 소속 파트너들은 매년 5년 임기로 가족대표 12명을 민주적으로 선출한다. 이렇게 구성된 것이 바로 '가족위원회'다. 가족위원회는 머크그룹의 근본적이고도 기업경영의 전략 방향 결정에 관여한다. 또 다른 가족위원회 주요 역할은 하위위원회인 파트너위원회 구성원 9명을 선출하는 것이다. 파트너위원회는 머크 가족 중 5인, 헬스케어, 생명과학, 전자소재 등 분야에서 실력이 충분히 입증된 외부 전문가 4인까지 총 9인 체제로 운영된다. 머크가문과 비(非)머크가문으로 구성된 파트너위원회에서 운영회사 머크 최고경영진을 뽑는다. E. 머크 KG는 머크 경영 부문에 조언하는데, 이는 일반적인 상장기업에서 자문위원회 기능과도 유사하다. 그렇다고 해서 기업 경영의 일상 업무에 일일이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지배구조는 어떤 장점이 있나.
▲바로 가족경영기업의 장기적 안정성과 금융기관·애널리스트·투자자의 단기적 통제다. 기업에 대한 가문의 통제력은 계속 유지하되 자본 소유와 회사경영은 엄격하게 분리하는 효과도 준다. 일상적인 회사 운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면서도 경영 관리감독은 가족의 직접적인 영향과 통제 아래 둔다. 가족 오너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전횡을 일삼는 것을 미연에 막아준다는 장점도 있다. 가족구성원은 스스로를 머크의 오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후대를 위해 신탁을 관리하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선대에게 물려받은 기업을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시켜 자녀와 그 후손에게 물려주길 원한다. 이 때문에 E. 머크 KG가 소유지분에 해당하는 만큼 배당을 받는다고 해도 후대를 위해 배당수익의 대부분을 회사로 귀속시킨다. 이는 미래의 성장을 위해 재투자를 가능하게 한다.
앞서 언급했듯 가족구성원은 머크 상장 주식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대신 상장회사 머크의 해당 자산은 E. 머크 KG에 귀속돼 있다. 이것을 가족이 100% 보유한다. 지주회사가 보유한 주식은 상장되지 않으며 가족 내에서만 거래가 가능하다.
-가족소유기업으로 무려 350년간 오랜 역사와 지속적 성장을 이끌어온 전략이자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오랜 시간의 여정 동안 머크는 수많은 전쟁, 팬데믹, 하이퍼 인플레이션과 경제붕괴 등을 헤쳐왔다. 머크가 모든 역경을 뚫고 이겨내게 해준 원동력은 무엇일까. 나는 두 가지 측면이 매우 중요하다 믿고 있다. 바로 '구조와 문화'다.
먼저 머크가족, 가족과 회사 간 상호작용을 효과적으로 규정하고 통제하기 위한 적절한 지배구조를 확보했다. 기업 오너의 책무는 우리가 소속된 경제공동체와 사회를 위해 기업 역할을 보호하고 보다 강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회사 성과를 이끌어 내는 장기적 관점에서 투자 철학을 갖고 일해야 한다.
문화적 측면에서 보면 머크는 명확한 목표와 인류 진전을 위한 가치에 기반한 기업이라고 자신한다. 머크의 가치인 용기, 성취, 책임, 존중, 통합, 그리고 투명성은 머크 임직원뿐 아니라 머크 가족을 이끄는 핵심 지침이다. 이런 점은 조직 직급과 상관없이 일상생활에서 우리 행동 방식을 정의한다.
-머크는 소유와 경영 분리 시스템을 일찌감치 도입했다. 외부인에게 경영을 맡길 때 불안 요소를 차단하기 위한 특별한 방법이 있나.
▲이미 우리 선대는 외부인 도움 없이 복잡다단한 머크 사업을 운영할 우수한 과학자와 경영인 등 인재를 머크 가문 사람으로만 충원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1920년대부터 가족이 아닌 사람을 이사진으로 임명하고 경영에 참여시켰다. 오늘날 머크 이사회 구성원에는 머크 가족 일원이 아닌 최고경영진이 포함된다. 이는 오랫동안 성공해온 머크 전통이다.
-남다른 기업운영 방식만큼 머크 가문의 특별한 문화가 있을 것 같다. 머크가(家)가 중요시하는 가치와 자녀 교육 방법은 무엇인가.
▲머크가 헌신이라는 가치 아래 명확한 목표와 고객 만족을 위한 진정성 있는 기업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827년 이후 임마누엘 머크는 세 아들에게 두 가지를 명확히 했다. 첫째 사업적 이해가 가족 이해관계보다 언제나 우선돼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최고 품질의 제품만을 공급하며 언제나 사업 파트너와 고객에게 정직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 세대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 이상으로 자녀와 후손에게 더 나은 모습으로 기업을 물려주기를 원한다. 이것이 우리가 더 나은 성장을 위해 기업에 지속적으로 재투자하는 이유다.
-10년 전 전자신문과 인터뷰를 진행했고 이후 10년이 흘렀다. 그동안 머크의 변화는 무엇이 있는가.
▲354년간 역사를 이어오며 머크는 계속 진화해왔다. 머크는 수 세기간에 걸쳐 다양한 역경과 난관을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지난 10년 동안 머크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머크는 회사 전략에 부합하지 않는 사업은 매각하는 동시에 시그마알드리치(2015년)와 버슘 머티리얼즈(2019년)처럼 머크 포트폴리오를 보완했다. 매력적인 시장에서 머크 입지를 강화하는 기업을 인수, 선도적인 과학기술회사로서 지속적으로 변혁을 이뤘다.
머크는 '선(善)'을 위한 힘으로서 과학을 믿는다. 머크 세 개 비즈니스 부문 라이프사이언스, 헬스케어와 일렉트로닉스는 수백만명 사람들의 삶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낸다. 대표 사례로 코로나19 대유행 동안 80여개 이상 백신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2018년 머크는 350주년을 맞이했다. 그때를 변곡점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또 다른 100년을 준비하며 직면한 현안은 무엇인가.
▲과거 수년간 세계를 둘러싼 경영환경과 사회에는 수많은 역경이 있었다. 지금도 예외는 아니다. 유럽에서 발발한 전쟁, 지역 간 긴장, 현재 진행 중인 팬데믹, 공급망 붕괴와 에너지·물류,·원자재 원가 상승은 높은 시장 변동성에 영향을 끼치는 일부 요소에 불과하다.
경영 환경이 외부 도전을 받는 시기에도 머크는 지속적으로 성과를 내고 있다. 올해 2분기에도 강력한 성과를 거두며 회복 탄력성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했다. 앞으로도 머크는 세계 고객과 환자들에게 가치를 제공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할 것이다.
-3세기 이상 이어온 머크 역사를 바탕으로 막 경영을 시작한 한국 스타트업 젊은 창업가에게 해줄 조언이 있는가.
▲장기적 관점에서 발명뿐 아니라 재발명 또한 중요하다. 머크는 거듭해 스스로를 성공적으로 재발명해냈다. 건전한 기업지배구조, 강력한 문화, 기업을 이끄는 명확한 가치, 그리고 인류 진보를 발전시킨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를 통해 많은 난관을 해결했다. 그래서 나는 젊은 사업가에게 스스로 진정한 목적 의식과 윤리적 나침반을 절대 잊지 말라고 한다. 끊임없이 현 상태에 질문하고 도전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한국은 머크에 어떤 시장인가. 또 어떤 기대를 갖고 있나.
▲머크는 한국에서 35년 이상 끈끈한 파트너로 활동해왔다. 그동안 머크는 한국에서 1억유로 이상 투자했다. 오늘날 11개 사업장에서 1500명이 넘는 직원을 고용하고 있다. 한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사업 부문은 일렉트로닉스다. 우리는 한국에서 '디지털 삶'을 발전시키는 회사들이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도록 돕는다. 머크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소재를 제공하는 것이 대표 사례다. 지난달 머크는 반도체 솔루션 비즈니스 역량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한국에 본사를 둔 메카로 화학사업 인수 본계약을 체결했다. 현지 생산과 R&D 시설에도 투자하고 있다. 이같은 행보는 한국 시장을 향한 머크의 확신을 잘 보여준다.
-40주년을 맞는 전자신문에 대한 축하 메시지를 부탁한다.
▲지난 40년간 전자신문은 분명 많은 난관을 성공적으로 헤쳐나갔다. 디지털화와 글로벌화로 더 국제적이고 역동적인 독자가 등장하고 새로운 양상과 방식의 미디어 소비가 출현했다. 본디부터 발 빨랐던 미디어 세계를 얼마나 크게 바꿔 놓았을지 그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급변하는 시기에 전자신문은 관련성 높은 뉴스, 이야기와 배경 지식과 정보를 지속적으로 독자에게 제공했다. 한마디로 독자들의 정보 욕구를 잘 충족시켜 줬다. 다시 한번 축하 말씀 전하며, 전자신문의 다음 40년을 기대한다.
◇프랑크 스탄겐 베르그 하버캄 박사는…
1948년 독일 도르스텐에서 태어났다.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와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7년까지 프라이부르크 대학 부교수를 지냈다. 코메르츠은행, 베어링브라더스, 런던함브로스 등에서 일하다 1994년 머크 지주회사인 E. 머크 KG 파트너위원회 부회장에 올랐다. 2004~2013년 파트너위원회 회장을 역임하고 2014년 3월 머크 가족위원회와 E. 머크 KG 회장으로 취임했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