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2월 말. 경상현 박사는 정부 방침에 따라 전자교환기 도입 타당성 검토 업무를 총괄하기 위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KIST) 초빙연구원으로 파견됐다. 전자교환기 도입에 대한 기술 분석은 안병성 박사, 경제 분석은 유성재 박사가 각각 책임을 맡았다. 경 박사의 생전 증언. “그해 3월부터 미국·일본·독일·벨기에 교환기 업체 대상으로 입찰을 검토했습니다. 이어 타당성 검토를 위한 국제입찰이란 조건을 달아 4월 17일 안내서를 AT&T, ITT, GTE, NEC, 지멘스, 후지쯔 등 6개 업체에 보냈습니다.”
연구소는 모든 응찰자는 제안한 내용에 대해 책임을 지며 입찰 보증금을 예치해야 한다는 점과 교환기 가격과 부품생산설비 원가, 기술료, 교육훈련비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해 6월 14일 응찰을 마감한 결과 AT&T를 제외한 5개 업체가 입찰에 참여했다. 이들이 제시한 가격에는 편차가 많았다. GTE가 회선당 550달러로 가장 비쌌다. NEC는 회선당 170달러로 가장 낮은 가격을 제시했다.
경 박사는 이들 업체의 응찰 내용을 면밀히 검토해서 이런 조건이라면 경제성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우선 반제품을 수입해 국내에서 조립생산을 하다가 단계별로 국산화를 추진하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경 박사는 7월 초 검토 결과를 경제기획원과 체신부에 보고했다. 같은 해 8월 13일. 정부는 전자교환기 기종 선정과 도입에 따른 각종 현안을 결정할 기구로 이경식 체신부 차관을 위원장, 관련 부처 차관보를 위원으로 한 전자통신개발추진위원회(TDTF)를 구성하고 첫 회의를 체신부에서 열었다. 회의에는 서석준 경제기획원 차관보, 김동규 상공부 중공업차관보, 청와대 경제1비서관, 과학기술처 종합기획실장,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 경상현 박사 등이 참석했다.
같은 해 12월 18일. 이날 오전 열린 경제장관간담회에서 전자교환기 도입 기종과 생산에 관해 몇 가지 원칙을 결정했다. 우선 기종은 단일기종으로 하고, 교환기 생산업체는 교환기 본체 생산을 위해 전액 산업은행 출자로 1개 업체를 설립하며, 기술 도입 전담기구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부설로 연구소를 설립한 후 체신부 산하 연구기관으로 이관한다 등이었다.
그해 12월 27일. 박원근 체신부 장관이 아날로그 전자교환기 국산화와 통신망 및 전자화, 디지털 전자교환기술 국내개발 계획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해 재가를 받았다. 그 자리에는 남덕우 부총리, 장예준 상공부 장관, 오원철 청와대 경제2수석, 경상현 박사 등이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두 가지를 지시했다. 전자교환기 기술개발을 전담할 연구소를 설립할 것과 산업은행 출자로 전자교환기 생산업체를 설립하라는 지시였다. 박 대통령의 전자교환기 국산화에 강력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정부는 같은 해 12월 31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부설 한국전자통신연구소를 설립했다. 박 대통령 지시 나흘 만의 초고속 설립이었다. 초대 소장은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부소장이자 청와대 메모콜 프로젝트 개발 책임자이던 정만영 박사가 취임했다. 부소장으로는 경상현 박사, 김종련 박사, 안병성 박사 등 3명을 임명했다. 정만영 소장의 생전 회고.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청와대 의뢰로 자동교환기 개발을 진행한 바 있습니다. 기술개발 후 청와대가 제품을 인수하지 않아 미국 GTE사와 공동개발을 해서 나름의 기술 축적을 한 상태였어요. 그런 이유로 연구소 내부에서 전자교환기를 국산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가 적지 않았습니다.”
경 박사는 연구소에서 도입 기종 선정 총괄책임을 맡았다. 기술반은 안병성 박사, 경제반은 유성재 박사, 생산반은 박헌서 박사가 각각 책임자였다. 김영무 김&장 법률사무소 변호사(현 김&장 대표)가 계약전문가로 참여했다. 이후 체신부의 정도길 전자교환기도입 전담반장이 응용분야 책임자로 합류하고 이강우 경제기획원 투자3과장, 유영준 상공부 전자공업과장, 장석정 과학기술처 과학기술심의관이 해당 분야 정책을 지원했다. 과학기술처는 1977년 3월 15일 전자통신연구소를 특정연구기관으로 지정했다.
박 대통령이 지시한 교환기 생산업체인 한국전자통신㈜은 1977년 2월 15일 창립총회를 열고 사장에 한국1호 컴퓨터를 개발하고 한양대 공대학장과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을 지낸 이만영 박사를 선임했다. 이 회사는 같은 해 3월 7일 오후 대우빌딩 23층에서 현판식을 갖고 업무를 시작했다. 도입 기종 선정 총괄 책임자인 경상현 박사는 우선협상 대상으로 ITT와 후지쯔 등 2개 업체를 선정하고 재협상을 진행했다. 경 박사팀은 같은 해 4월 10일부터 40여일 동안 20여명으로 현지 실사반을 구성해 벨기에 ITT와 일본 후지쯔를 방문하고 기술력과 원가 분석, 제품 성능 등을 면밀히 조사했다.
기술반원으로 일한 박항구 박사(현 소암시스텔 회장)의 회고. “한국 통신의 미래가 걸린 일이어서 모두 열심히 일했습니다. 정부 책임자인 이경식 체신부 차관은 벨기에에까지 가서 실사반을 격려했어요.” 같은 해 8월 13일. 경 박사는 실사반의 현지 조사와 협상 내용을 토대로 최종 협상 결과를 체신부에 보고했다. 정부는 이 같은 내용을 종합해서 그해 9월 최종 도입 기종으로 ITT의 M10CN을 선정했다.
경 박사의 생전 증언. “일본 후지쯔 기종이 기술이나 성능, 가격 등에서 벨기에의 ITT보다 앞섰습니다. 문제는 후지쯔는 한국에 핵심 기술을 이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ITT는 모든 기술을 다 이전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전자교환기를 국산화해야 하는 한국의 선택은 자명했어요. 그건 ITT였습니다.”
1977년 11월 15일. 정부는 대통령령 제8745호로 전자통신개발추진위원회를 설치했다. 체신부 장관이 위원장인 위원회는 경제기획원 차관, 재무부 차관, 과학기술처 차관, 조달청장과 전자통신에 관한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 가운데 체신부 장관이 위촉하는 사람 등 8명 이내로 구성했다. 추진위원회는 전자교환방식 도입과 개발사업 종합관리, 외국기업과 총괄계약 체결, 외국기업 감독과 업적 평가, 관계기관과 생산업체 총괄 조정과 감독 등 업무를 담당했다. 위원회 간사는 정도길 체신부 기술정책관이 맡았다.
정부는 같은 해 12월 10일 한국전자통신연구소를 과학기술처에서 체신부로 이관했다. 명칭도 재단법인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로 변경했다. 체신부가 전자교환기 주무 부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기술연구소 설립자로 나섰고, 자본금 100만원을 기부했다. 기술연구소는 이날 서울민사지방법원에 등기번호 1534호로 등기도 완료했다.
한국통신기술연구소는 통신기기 기술과 전자통신 시스템, 운용기술과 관련 기술에 대한 조사 연구개발을 전문으로 수행키로 했다. 정부는 등기와 동시에 기술연구소를 특정연구기관으로 지정했다. 소장인 정만영 박사와 부소장인 경상현·김종력·안병성 박사는 모두 유임됐다.
같은 해 12월 13일. 한국전자통신연구소는 이날 오후 2시 서울 광화문 체신부 청사에서 현판식을 갖고 한국통신기술연구소로 출범했다. 연구소 출범은 한국 통신혁명의 초석을 놓은 일이었다. 이날 현판식에는 박원근 체신부 장관과 이만영 소장 등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출범 당시 50여명이던 기술연구소 인력은 우수 두뇌 확보에 나서면서 1978년에는 175명, 1980년에는 350여 명으로 해마다 늘어났다.
한국통신기술연구소는 1980년대 들어 한국전자통신연구소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어 1가구 1전화 시대를 연 전자교환기(TDX) 개발과 D램 반도체, 세계 최초 CDMA 상용화 등으로 한국 통신혁명을 주도했다. 연구소는 1997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으로 명칭을 변경했고, 오늘날 세계 정상급 연구기관으로 우뚝 섰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