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에서 준공까지 20년. 멀고 힘든 길이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의 메카로 불리는 대덕연구학원도시(현 대덕연구개발특구) 건설은 20년 동안 계속된 대하 과학드라마였다.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은 과학기술 입국을 향한 정부의 거대한 미래 설계였다. 계획은 정부가 1967년 수립한 '과학기술개발 장기 종합계획'이 출발점이다.
종합계획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연구기관이나 대학을 분산하지 않고 일정한 장소에 집합시켜 연구, 학원단지를 조성하면 연구시설과 연구자료를 공동 이용할 수 있어 여러 분야에 관련한 종합연구 등으로 연구 능률을 극대화할 수 있다. 특히 계산센터와 분석센터, 보수센터 등 대규모 연구보조 시설을 공동 활용하면 대학교육과 연구를 병행 추진해 인재 양성에도 효과가 클 것이다. 따라서 장기 관점에서 1980년대를 지향한 과학한국의 미래를 위해 연구학원도시 조성을 연구 검토한다.”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은 종합계획에 따라 제2 연구단지 조성을 검토했다. 최형섭 장관의 회고. “흩어진 연구기관을 한곳에 모아 협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구기관이 협동체를 만들 경우 기기나 시설을 공동으로 이용하는 것은 물론 연구원 간 교류가 활발해 연구 과제나 연구 활동 범위가 넓어져 지적 공동체로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해 연구학원도시 건설을 구상했다.”(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과학기술처는 1970년 10월 경제과학심의회 이덕선 서기관에게 '연구학원도시 조성 마스터플랜' 작성을 위한 연구조사를 의뢰했다. 그 무렵 외국에서는 학원·연구단지를 건설해서 운영하고 있었다. 미국 노스캐롤나이나주 트라이앵글연구단지, 일본 쓰쿠바 연구학원단지,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연구단지 등이 대표적이었다. 도시 특징은 계획한 연구학원도시라는 점이다.
과학기술처는 외국의 우수 사례를 참고해 연구학원도시를 건설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당시 과학기술처 종합계획관으로서 작업을 담당한 권원기 전 과학기술처 차관의 증언. “과학기술처가 연구학원도시를 건설하려는 이유는 명확했다. 첫째 연구기관과 교육기관 연계, 둘째 연구교육 환경 개선, 셋째 활발한 인적 정보교류, 넷째 공동연구 촉진, 다섯째 정보와 계산시설 공동 이용, 여섯째 공동 시설 활용, 일곱째 수도권 인구집중 완화였다.”(과학한국, 그 꿈을 향한 선택)
조사연구 내용은 선진국 연구학원도시 사례 분석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국내 교육·연구기관의 입주 환경 조사 및 이전 기관 선정, 단지 후보지 추천, 단지 조성 마스트플랜 작성 및 추진방안 제안 등이었다.
이덕선 서기관은 1971년 7월 '연구·교육단지 건설을 위한 마스터플랜'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과학기술처에 제출했다. 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입지 후보지=경기 용인군 포곡면 일대와 서울에서 직선거리 35㎞, 교통시간 1시간 내외, 영동고속도로 경기 용인 인터체인지 북쪽 3㎞ 지점 △단지 인구와 부지=전체 개발 면적 1200㏊(360만평), 단지 면적 700㏊(210만평) △입주 대상=서울에서 이주기관(국공립 시험연구기관 22개, 기술행정기관 3개, 대학 2개), 신설기관(비영리 연구기관, 입주 희망 민간기업 연구기관) △연구교육 기관 배치=공동 이용 시설(도시 중심), 이공계 기관(도시 동북쪽), 생물계 기관(도시 동남쪽), 문교계 기관(도시 서쪽) △기타 사항=토지 이용계획과 교통망 계획, 상하수도 계획, 공원과 녹지지대 계획, 인구 분산 계획, 원주민 대책, 건축 규제, 건설비 추정과 건설 계획, 단지 조성 방안 등이다.
과학기술처는 보고서를 참고해 연구학원도시 건설 계획을 마련, 대통령 연두순시 때 보고키로 했다. 1972년 1월 14일 오전. 내심 기다리던 날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과학기술처를 연두 순시했다. 대통령에 대한 새해 업무계획은 이응선 과학기술처 기획관리실장이 보고했다. 보고 내용에 '연구학원도시 건설 계획'을 포함했다.
하지만 기대는 실망으로 변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국공립 연구소 가운데 유사한 연구기관을 통합 정비하고 유능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라”고 지시하고 자리를 떴다. 내심 기대에 부풀어 있던 최형섭 장관을 비롯한 간부들은 실망감이 컸다. 그렇다고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고 부처 간 협조가 필요한 국가사업을 대통령 승낙 없이 과학기술처 단독으로 추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과학기술처는 한 해를 더 기다리기로 했다. 이듬해 새해 업무 시 완벽한 연구학원도시 건설계획을 마련해서 재도전키로 방침을 정했다. 권원기 전 차관의 이어진 회고. “우리는 사업계획 내용을 보완해 1973년 연두 업무보고 시 다시 보완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면서 보고서 작성에 전력을 다했다.”
최형섭 장관은 한국과학기술연구소 과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사업계획을 원점에서 다시 작성했다. 사업계획은 지역균형 개발과 수도권 인구 분산까지를 포함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설 이념=세계 수준의 두뇌 과학도시, 직장과 주거지가 근접한 이상 도시,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사색 공원도시 △건설 필요성=중화학공업 지원을 위한 전문 연구기관 신설, 서울과 수도권 국공립 시험연구기관 이전, 민간 연구기관 입주, 대학과 지적 공동체 형성, 수도권 과밀인구 집중 완화 △연구단지 규모=상주 인구 5만명, 부지 규모 1100㏊(330만평) △건설 기간=1973~1982년(10년) △추진 방안=종합과학기술심의회의 확정 후 건설 전담 기구 설치, 제2 연구단지 건설추진본부 설치 △입법 조치=제2 연구단지 조성법, 제2 연구단지 특별회계법이다.
1973년 1월 17일. 1년을 기다린 날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오후 과학기술처를 연두 순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의 안내를 받으며 정부종합청사 19층 과학기술처 회의실로 들어섰다. 회의실에는 국무총리와 부총리, 각 부처 장관, 청와대 비서실장과 수석 비서관, 여당 간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흥선 기획관리실장이 새해 업무 계획으로 과학기술처가 1년여 준비해서 마련한 '연구학원도시 건설계획'을 보고했다.
“각하, 기술개발 핵심인 전자, 선박, 기계, 석유화학 등 전략산업 기술연구기관의 단계적인 설립과 서울에 산재한 국공립 시험연구기관들의 이전이 시급합니다. 이들 연구기관을 한데 모아야 연구기관의 역할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서울 홍릉연구단지에 이어 제2 연구단지 건설이 필요합니다.”
최형섭 장관도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각하께서 이 사업 추진을 허락해 주신다면 관계부처와 구체적으로 협의해서 마스터플랜을 수립해 계획적으로 추진하겠습니다.” 보고가 끝나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박 대통령에게 쏠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침묵했다. 숨 막히는 순간이 흘렀다.
박 대통령이 긴 침묵을 깨고 말문을 열었다. “좋소. 제2 연구단지 조성은 필요합니다. 기존 연구시설이나 토지 등을 처분하고 정부 예산을 합쳐 연차적으로 추진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연구하시오.” 박 대통령의 이 지시가 대덕연구학원도시를 국가사업으로 확정하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 최형섭 장관과 과학기술처 직원들은 소리 없이 환호했다.
권원기 전 과학기술처 차관의 증언. “박 대통령 지시에 그동안의 수고를 모두 보상받은 것 같아 남다른 감격에 젖어 한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습니다.” 최형섭 장관은 단지 건설을 위해 같은 해 3월 5일 연구조정실을 종합기획실로 조직 개편했다. 실장으로는 전상근 국립과학관장을 전보 발령했다. 전상근 실장은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으로서 최형섭 장관과 함께 한국과학기술원과 과학기술처 출범의 산파 역할을 한 우리나라 과학기술 행정의 최고 정책입안자였다. 내부 전열을 정비한 과학기술처는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과학기술연구의 새로운 장을 여는 대역사의 힘찬 출발이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