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포럼은 2019년 국가경쟁력 평가 결과에서 우리나라 기업이 높은 수준의 혁신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렵다는 진단을 내놨다. 정부 규제가 기업 활동에 초래하는 부담이 높고 규제개혁에 대한 법률적 구조 효율성이 낮다는 진단이다. 3년 후인 2022년 우리나라는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의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63개국 가운데 27위를 기록, 전년 대비 4단계 하락했다. 분야별로 살펴보면 기업 효율성 순위 하락(27→33위)이 두드러졌다. 특히 세부 항목인 기업의 기회 활용력 및 위기 대응력, 기업가정신 수준이 큰 폭으로 하락했다. 규제 개혁을 통한 혁신성 증대와 신시장 선점이 절실하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인류는 혁신을 통해 가치를 누릴 더 나은 방법을 찾아 왔다. 가치를 추구하는 인류에게 혁신은 지속 가능한 번영을 보장하는 필수 활동이다. 기업가 혁신이 내포한 잠재적 가치가 온전히 발현·전이되려면 '의도적 타이밍'(Intended Timing)이라 일컫는 상황적 조건의 연결이 필요하다. 이는 사회·경제·환경적 맥락에서 일어난 일련의 우연적 사건을 특정 시점에 의도적으로 연결했을 때 비로소 혁신을 통한 생각의 실체화가 이뤄진다는 개념이다. 기업가는 상황적 조건에 따라 자신이 포착한 혁신 기회를 실현할 의도적 타이밍을 결정한다.
이때 정부 규제는 혁신의 시장 도입에 필요한 상황적 조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규제가 혁신의 가치 창출 여부 및 수준은 물론 가치 수혜자가 누구인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시장은 공급자와 수요자 간 거래가 이뤄질 때 존재하며, 거래는 혁신을 촉발하는 요소다. 거래 확보를 위한 공급자 간 경쟁적 혁신이 일어날 때 수요자가 누릴 효용과 혜택은 더 높아진다. 이를 위해 규제 기관은 시장 범위와 경쟁 성격을 규정하고, 혁신이 시장에 미칠 영향을 평가해야 한다. 평가 분석을 토대로 기존 규제 관행이 혁신을 과도하게 제한하거나 방해하지 않도록 개선해야 할 책임도 있다. 즉 혁신에 대한 시장 신뢰를 구축하는 책임은 규제 기관에 있다.
산발적으로 출현하는 혁신에 대한 세심한 규제 개입이 요구되는 오늘날 규제 기관의 정책 입안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규제 개혁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첫째 규제 개혁에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란 없다. 혁신은 이중적 위험을 내포한다. 이를 시도할 때 감당해야 할 위험보다 회피할 때 닥칠 위험이 더 클 수 있다. 불가피한 혁신이라면 위험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둘째 규제 개혁은 개방적이어야 한다. 혁신을 둘러싼 여러 이해 관계 집단의 가치 판단을 수용, 투명성과 예측성을 높여야 한다. 규제 기관은 중립적 태도를 고수하고, 혁신 반대자로부터 과도한 정치적 영향을 받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셋째 규제 개혁은 가정이 아닌 증거에 기반해야 한다. 예방을 위한 성급한 규제 개입보다는 사례 발굴을 위한 체계적 규제 실험을 통해 증거를 수집하고 학습해야 한다. 이러한 접근은 규제 기관의 변화 대응력을 높이는 데 유효하다. 넷째 적절한 시점에 규제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혁신을 너무 일찍 규제하면 잠재적 경제 성장의 기회를 잃을 수 있고 너무 늦으면 위험 확산으로 시장 신뢰를 회복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규제 기관은 시장·산업과 상호작용해 적응력을 높이고,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 증거 기반의 규제 개혁을 신속히 추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규제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진화해야 한다. 규제는 제정 당시의 상황적 맥락을 반영하는데 상황이 변동하면 해당 규제의 적용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 이는 정책 입안자가 엄격한 규제 적용과 동시에 유연한 규제 조정도 염두에 둬야 함을 의미한다.
혁신을 촉진하기 위해 규제가 존재하는 건 결코 아니다. 규제는 혁신이 사회·경제·환경에 미칠 부정적 영향 관리에 목적이 있다. 하지만 규제의 제정과 적용은 기업가가 혁신을 개시하는 의도적 타이밍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규제 기관의 정책 입안자는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규제 개입이 혁신에 미칠 잠재적 영향을 심도 있게 고려해야 한다. 유연하지만 한정된 규제 실험을 통해 사례 증거를 지속 발굴해서 표준 지침을 제정하는 한편 발생 가능한 문제를 규명하고 명확한 시정 조치를 제안, 시장에서 혁신이 채택될 상황적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서리빈 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 교수 ribinseo@postech.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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