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도로는 아무 교차로에서나 유턴을 할 수 있다. 유턴을 할 수 없는 곳만 금지 표시를 해 놓았다. 산업 규제도 비슷하다. 금지사항(네거티브·Negative)만 지키면 나머지는 모두 자유롭게 해도 된다. 마치 커다란 목장에 양들을 풀어 놓고 울타리를 쳐 놓은 방식이다. 울타리 안에 있는 한 무엇이든 마음대로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자율주행, 차량·숙박 공유, 원격의료, 핀테크 등 혁신 기술이 탄생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이런 네거티브 규제가 한몫하고 있다. 규제 걱정 없이 얼마든지 신기술을 개발해서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환경이어서 연구자가 오로지 연구개발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는 허용(포지티브·Positive)하는 것만 할 수 있다. 국내 도로는 유턴 허용 지역이 따로 있다. 규제시스템도 마찬가지다. 원칙적으로는 금지하고, 할 수 있는 사항을 정해 놓은 방식이다. 그렇다 보니 새로운 개념의 서비스나 제품을 개발해서 시장에 출시하려면 우선 법·제도에 저촉되지 않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미국처럼 사후규제가 아닌 사전규제이기 때문이다.
이 덕에 한국 벤처·스타트업 창업자들은 필요 이상으로 법률지식에 해박하다. 제품과 서비스 개발에 집중하기보다 해당 규제 내용과 법조문 등을 달달 외우고 있는 스타트업 창업자가 부지기수다. '규제를 피하려면 혁신적이면 안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런 꼼꼼한 규제는 창업자들의 상상력을 제한한다. 그리고 결국 그들을 좌절시키고 포기하게 만든다.
한 예로 이미 누적 이용수가 3000만건을 넘어서며 이제 우리 일상 의료로 자리매김한 비대면 진료 및 약배송 서비스는 아직까지 공식 제도에 근거한 정식 사업 모델이 아니다. 코로나19 위기로 '한시적 허용'이라는 위태로운 합법 기반 위에 서 있으며, 코로나19 상황이 '심각 단계' 그 아래로 떨어지면 비대면 진료 및 약배송 플랫폼 업체들은 모두 의료법과 약사법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불법업체가 된다. 또 국내 리걸테크 업계는 해외 리걸테크 시장이 급성장하는 동안 전문직역단체와의 갈등으로 사업이 전면 중단되거나 위축된 상태에 놓였다. 기술 발전과 혁신 창발 속도를 제도 변화가 따라가지 못하면서 종래의 산업구조 및 전통적인 이해관계자들에 의해 설정된 거미줄 규제가 신산업 날개를 옭매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정부는 지난 6월 경제 규제혁신 TF를 출범시키고 두 차례의 경제 규제혁신 방안을 통해 현장애로 해소, 신산업 등 총 6개 분야 86개 개선과제를 발굴하는 한편 그동안 기업과 시장을 옥죄는 낡은 규제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특히 현장의 목소리에 정책 방향을 집중해서 규제혁신 전 과정에 민간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 미래지향적 네거티브 규제로의 정책전환 의지를 밝혔다는 점에서 크게 환영할 일이다.
규제혁파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국민 편익을 목표로 한 정부의 강력한 실천 의지다. 많은 법적 규제가 일반 소비자 혹은 국민을 보호하려는 애초의 취지와 달리 특정 이익 집단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해서 오히려 국민 편익을 막고 신산업 태동의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미국, 스웨덴 등 우리가 벤치마킹할 만한 기준 국가를 정한 뒤 규제 수준을 최소한 그 나라 수준에 맞추는 '기준 국가제' 설정 등 신산업 진입 규제 해소를 위한 명확한 추진방향 설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국무조정실 등 컨트롤타워 권한 강화 및 민간 전문가 중심의 안건 발굴, 논의 등을 통해 좀 더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규제를 해소해야 한다.
규제 혁신, 즉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하려는 노력은 민간 경제 능력을 신뢰하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다. 불신을 전제하는 포지티브 규제를 과감히 혁파하고 신뢰를 기반으로 한 네거티브 규제로의 대전환을 이뤄 내야만 비로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혁신성장의 날개를 달 수 있을 것이다.
강삼권 벤처기업협회장 sk@kov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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