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에 '연구 프레카리아트'(Research Precariat)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이는 고용이 불안정한 기간제 박사후연구원(post-doc)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OECD는 '신진 연구자의 경력 불안정성 해소 방안' 보고서를 통해 세계적으로 많은 박사후연구원이 불리한 고용 조건과 불확실한 경력 경로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2020년 네이처가 93개국 7600여명 박사후연구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자신의 미래 경력전망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예측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과반인 56%에 달했다.
과학기술인 경력 생애 주기 관점에서 볼 때 박사후연구원 단계는 앞으로 경력 및 연구 성과의 당락을 결정하는 중요한 시기인 만큼 이들에게 시의 적절하게 기회와 자원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 박사후연구원협회(NPA)도 이들을 '학위 취득 후 향후 경력에 필요한 역량을 얻기 위해 정해진 기간 연구 또는 학문적 훈련을 지도받는 자'로 정의하며 지지와 도움이 필요한 대상임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모든 이공계 인재가 전문가로 성장하기 위해 경력 단계별로 적합한 지원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숙련 기간을 오래 보내는 등 생산성이 가장 높은 시기임에도 많은 박사후연구원이 지원 사각지대에 놓여서 역량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현실은 특히 안타깝다.
대표적으로 2009~2018년 미국 내 과학기술 분야 박사후연구원 진로 진출 경로를 분석한 Denton.M 등 연구에 따르면 희망 경로 1순위로 꼽히는 정년직 교수 트랙으로 진출하는 비율이 전체의 22~33%다. 나머지는 공공이나 산업계, 심지어는 전공과 다른 분야로 진출하는 것이 현실인데 이들은 박사후 연구원 기간 다른 경력경로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얻지 못하거나 역량 향상 기회가 부족한 것으로 미국대학원협의회(CGS)에서 발표한 2022년도 조사 등을 통해 밝혀졌다. 이는 유럽 등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어 OECD에서는 이들의 경력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한 8가지 권고사항에 유연한 경력 전망 제시, 폭넓은 경력개발 및 훈련 기회 제공 등을 포함했다.
여러 선진국에서는 박사후연구원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박사후연구원 제도를 가장 먼저 도입한 미국은 2003년 박사후연구원협회(NPA)를 설립해 통계를 조사하고 IMPACT(Inclusivity, Mentoring, Peers, Awareness, Connection, Transition) 사업을 통해 멘토링, 동료 네트워크 형성, 경력개발 방향 설정 등을 제공하고 있다. 대학과 연구원에서도 역량 강화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추세로, 국립보건원(NIH)이나 코넬대 등 다수 기관에서 박사후연구원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독일도 2009년 대학원생 육성 독일대학협회(GUAT)를 설립해서 자국 내 박사급 인재 현황 데이터를 구축하고, 이를 근거로 경력 개발 시사점을 제시한다.
우리나라 박사후연구원이 성장할 토양은 갈수록 척박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나라지표 통계에 따르면 이공계 박사는 2000년 4235명에서 2020년 9525명으로 2배 이상 늘어났다. 이는 OECD 주요국 가운데 가장 빠른 증가세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은 국내 박사후연구원 3년 차 이내 인력 규모를 5000여명으로 추산했다. 그러나 공공부문 일자리 증가는 연간 1000명 수준에 머무르는 등 학계와 공공기관의 정규직 증가율이 이에 미치지 못해 일자리 경쟁은 매우 치열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러한 수요-공급 간 미스매치 현상을 해소할 방안으로 이들의 경력 경로 모델을 학계 진출 중심 선형적 파이프라인에서 정부·기업 등 다양한 경로로 진출하는 트리 모델로 재설정, 그에 맞는 지원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나 독일처럼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전담 조직이 부재하고, 각 조직 내에서도 경력개발 지원이 미흡한 게 현실이다.
실제 지난해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KIRD)에서 실시한 경력개발 실태조사에 따르면 공공기관과 이공계 대학 내 경력개발 전담 조직을 갖춘 비율이 각각 48.5%, 49.2%로 모두 절반 아래였다.
이제 우리나라도 박사후연구원에 대한 지원 체계를 기존 인건비 또는 연구비 지원 중심에서 다양한 경력 진출을 지원하는 생태계 조성까지 폭넓게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학계에 치우친 경력정보 비대칭성을 해소하는 한편 다양한 분야의 유망 직업 기회를 탐색하고 관련 역량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박사후연구원은 생산성이 가장 높은 창의 인재다. 이들이 학계·공공·민간 곳곳에서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이들의 경력 진출을 지원하는 것이 곧 미래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일이 아닐까. 이를 위한 정부와 각계의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박귀찬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원장 pkc68@kird.re.kr
-
이인희 기자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