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 업계는 유독 이번 겨울이 춥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코로나 팬데믹을 타고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지만 지금은 쌓이는 재고에 한숨만 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시작된 수요 둔화에 맞서 월드컵, 연말·연초, 아카데미 시즌 등 온갖 프로모션을 동원해도 소비심리는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2020년 초 역시 지금과 상황이 비슷했다. 갑작스러운 팬데믹으로 글로벌 경기는 바닥을 기었고, 소비심리도 되살아날 기미가 없었다. 필수재가 아닌 가전은 당연히 침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상황을 반전시킨 것은 정부의 전 국민 대상 재난지원금 지급과 고효율 가전 구매 지원 사업 등 경기 부양책이었다. 특히 에너지 소외계층에만 적용하던 고효율 가전 구매 지원 사업은 대상이 전 국민으로 확대되면서 유례없는 성장 발판으로 기능했다.
실제 2020년 국내 가전 시장은 전년 대비 18% 성장한 29조4000억원으로 뛰었다. 이듬해에는 32조원까지 성장했다. 삼성·LG 등 가전사는 연일 역대 최대 실적을 올렸다. 협력사 동반 성장과 친환경 기술개발 확산 등 직간접 경제 효과는 정부가 투입한 예산(3000억원)의 10배가 넘는다는 분석도 나왔다.
최근 들어 고효율 가전 구매 지원 사업을 다시 시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가전 업계는 정부에 공식 건의한 데 이어 전기차, 신재생 에너지처럼 법제화를 통해 체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에너지 고효율 가전 보급 확산, 가전 시장 활성화, 친환경 기술개발 확대 외 최근 이슈화된 에너지 사용료 부담 절감까지 제시하고 있다.
2020년에 시행한 고효율 가전 구매 지원 사업의 산업·경제적 효과는 이미 입증됐다. 그럼에도 정부가 주저하는 것은 국민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20년 제도 시행 이후 국민 세금을 써서 삼성·LG 등 대기업의 배만 불린다는 지적이 나왔다. 상당수 가전 기업이 중국 등 해외에 생산기지가 있거나 부품도 주로 외산을 쓰는 만큼 낙수효과가 적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무엇보다 가전 업체들은 세금 효과에 힘입어 최대 실적을 기록했지만 정작 국민이 느끼는 보상심리는 크지 않았다는 요인이 무겁게 작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전 업계의 요청은 자칫 '앓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국민과 정부 설득, 제도 시행은 명분에 달렸다. 그리고 그 명분은 기업이 만들어야 한다.
고효율 가전 확대, 산업 낙수효과, 시장 활성화 등 산업·경제적 효과를 넘어 국민을 설득할 실질적인 혜택까지 제시해야 한다. 고효율 가전 구매에 따른 중고가전 보상책, 서비스 혁신 방안 등 정부가 제도를 시행할 '녹색 명분'을 기업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정용철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