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저녁에 부모님께서 꼬깃꼬깃한 영수증 뭉치를 부탁하신다. 실손의료보험 청구를 위해 그동안 병원 영수증을 모아 놓으신 거였다. 애플리케이션(앱)으로 보험금 청구가 가능해지면서 팩스나 설계사를 통하던 과거와 비교하면 편리해졌지만 60세 이상 부모 세대가 손쉽게 일을 처리하기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나마 자녀가 집에 있다면 이를 부탁할 수 있지만 출가했다면 스스로 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다가 영수증이라도 분실하면 보험에 가입했더라도 보험금을 청구할 수 없게 된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이야기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골자로 하는 보험업법 개정안이 27일 예정된 국회 문턱을 결국 넘지 못했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강하게 반대해 온 의료계가 논의 자리에 참여키로 하면서 15년 만에 법안 통과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소위원회 안건에서 제외되며 무산됐다. 보험업법 개정안은 지난 22일에만 해도 법안소위 심사안건에 5번째 순서로 상정됐지만 최종 안건에서 제외됐다.
국민 3명 가운데 2명 이상이 가입해서 제2의 건강보험으로 불리는 실손보험. 이 보험의 청구 간소화를 추진해 온 역사는 길다.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 제도개선 권고에 이어 21대 국회에서 다수 논의되고, 윤석열 대통령의 주요 공약 가운데 하나로 오르는 등 여야를 막론하고 관련 법 논의가 지속했지만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바로 의료계 반발 때문이다. 의료계는 여전히 소비자 보호를 이유로 반대를 위한 반대를 거듭하고 있다.
현행 실손보험 청구는 소비자 누구나 불편하다. 물론 과거와 비교한다면 수단은 개선됐다. '보험 아줌마'라고 불리던 설계사가 필요 없다. 팩스 대신 스마트폰 앱으로 이런 절차가 모두 가능해졌다. 하지만 병원에서 진료비 세부 내역서를 받는 절차는 번거롭고, 자원 낭비도 크다. 디지털에 취약한 고연령층은 접근이 어렵다. 이렇다 보니 소액의 경우 번거로운 절차로 청구를 포기하는 사례도 많다.
현실과도 맞지 않다. 24시간 전산으로 모든 금융업무가 가능하고, 챗GPT 등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실제 사람과 대화하듯 금융 상담이 가능한 시대에 뒤떨어진다.
실손보험금을 처리하는 절차가 편리해지면 소비자가 겪게 될 불이익도 크게 감소한다. 놓치던 보험금 수령이나 혜택을 모두 챙길 수 있게 된다. 다음 달 9일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위한 '8자 협의체' 첫 회의가 열린다. 그 자리에는 그동안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반대해 온 의료계가 참여한다. 이번에는 조금은 진전된 성과가 있길 기대한다. 보험금 청구를 위해 스마트폰 카메라로 진료 내역서를 찍는 일은 그만둘 때가 됐다. 번거로운 절차를 더는 하고 싶지 않다.
박윤호기자 yuno@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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