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스카우트를 해도 중국으로 데려가지 않습니다. 근무나 생활환경이 완전히 달라지니까 엔지니어들이 성과를 내기 쉽지 않고, 가족 등 체재비도 지원해줘야 하니 고용하는 기업 입장에서 부담이 크죠. 한국에 회사를 세우고 한국 엔지니어를 고용해 필요한 기술을 가져가는 쪽으로 바뀌었다고 보면 됩니다.”
취재 중 만난 국내 반도체 설계(팹리스) 업체 인사 담당자의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중국 반도체 기업들이 판교, 정자동 등에 회사를 세워 한국 엔지니어들을 고용하고 있는 건 상당히 낯선 장면이다.
통상 해외 스카우트는 경쟁국 우수 인력을 빼내 본국으로 데려간다는 인식이 많았다. 몇 배 넘는 연봉을 받으며 중국으로 이직했다는 사례들, 국가정보원이나 검찰 등 수사기관이 해외 이직으로 기술을 빼돌리려 했던 사범을 검거했다는 사례가 실제로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스카우트가 아니어도 기업을 통째 인수하는 것이 기술 습득의 흔한 방식이다. 2002년 BOE가 국내 디스플레이 업체였던 하이디스를 인수하고, 2021년 중국계 사모펀드가 매그나칩을 인수하려던 것 모두 필요 기술을 빠르게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다. 이는 국내 기업도 예외는 아니어서 해외 지분 투자나 기업 인수, 해외 연구소를 세우는 것과 같다.
중국 기업들이 언제부터 한국에 반도체 연구개발(R&D) 기능을 두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는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다만 중국에 대한 기술 규제가 강화될수록 한국 진출이 늘어나고 있다는 게 산업 현장의 목소리다.
중국과 거래 중인 한 시스템 반도체 업체 대표는 “회사는 한국에 두고 그대로 운영할 테니 매각하라는 제안을 미·중 갈등 이후 부쩍 자주 받고 있다”면서 “중국이 미국이나 대만에서 반도체 기술을 확보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니까 한국으로 눈을 돌리는 게 아닌가 싶다”고 평가했다.
분당 일대에서 디스플레이 구동칩(DDI)을 연구개발 중인 A사, B사, C사 사례에서도 이런 경향이 엿보인다. 취재를 종합하면 ESWIN은 2017년 국내 와이드칩스를 인수하면서, C사는 3~4년 전부터 한국에서 OLED DDI를 개발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A사는 2022년 설립됐다. '2017년-2020년-2022년'이란 시간표가 그려지는데 중국이 2015년 '중국제조 2025'라는 제조업 이니셔티브 전략을 발표하면서 반도체 자립을 강조한 것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중국제조 2025는 2020년까지 반도체 자급율 40%, 2025년 70%를 달성하자는 게 골자다. 중국은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반도체 산업 육성을 추진해오고 있다.
문제는 중국 기업들이 한국 R&D를 통한 기술 습득이 합법적이어서 막을 방법이 없다는 데 있다. 외국 기업의 한국 투자는 열려 있다. 채용도 국내 일자리 창출에 기여해 권장하고 환영받는다. 아울러 직업 선택의 자유는 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권리다. 영업비밀을 들고 나가지 않는 한 엔지니어들의 이직을 막는 것이 오히려 불법이다. 그러나 경험 있는 국내 엔지니어들이 경쟁국 기업에서 일하는 것은 기술 추격에 가속도를 붙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국내 산업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다.
국내 한 시스템 반도체 업체 대표는 “네트워크와 클라우드로 연결된 세상에서 한국서 개발한 기술을 중국에 가져가는 건 1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라며 “결국 기술을 개발하는 사람이 어디서 일하느냐는 '사람의 문제'인데, 중국은 파격 조건을 제시하며 국내 경험 있는 우수 인력들을 흡수하고 있어 걱정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반도체 업체들은 국내에서 받는 연봉의 2~3배를 제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상당 주식을 제공해 동기부여와 성과창출을 독려하고 있다.
한 인사 담당자는 “연봉도 그렇고, 상장에 성공하면 막대한 보상을 받기 때문에 굉장한 유인책이 된다”고 말했다. 한 반도체 관계자는 “워낙 대우가 좋아 애국심이나 감정적인 호소 외에는 설득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고 말했다.
◇사람이 핵심…기술보호 대책 바꿔야
국내 기술보호 대책은 그동안 물리적인 해외 유출을 차단하는 데 집중했다. 수사를 통한 해외 기술유출 사범을 적발하거나 핵심 인력들의 출입국을 관리하겠다는 식이다.
산업부는 지난 2021년 반도체·이차전지 등 핵심 산업에 종사하는 민간 엔지니어 명단(리스트)을 작성해 관리하고, 출입국 정보를 열람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우수 인재의 해외 이직과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내놓은 대책이었지만 시행조차 못하고 있다. 지나친 개인 감시에, 법적 기반도 미비해서다.
사람이 기술을 개발하는 만큼 우수 인재들이 해외로 떠나지 않고, 국내에서 일할 수 있게 만드는 인력관리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 시스템 반도체 업체 대표는 “중국은 우수 인재를 유치하는 기업에 지원금을 주는 것으로 안다”면서 “우리도 해외에서 또는 국내에서 우수 인력을 채용할 경우 세제 혜택 등이 제공되면 중국과 경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우리나라 전체 DDI 설계 엔지니어 중 60%가 중국 회사에서 일한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나머지 40%가 한국 기업에서 일하는데, 이 중 절반 이상이 삼성·LX와 같은 대기업에서 일하는 숫자다. 이미 중국에 많은 인력을 빼앗겼고, 현재 기반도 매우 취약하다는 얘기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엔지니어 입장에서는 중국 기업인지 모를 수도 있고 높은 연봉을 마다하기도 쉽지도 않다”며 “국내에 위치한 중국 기업과 인력 이동 현황 파악부터 시작해 기술안보 관점에서 유출 방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송윤섭기자 sy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