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00억엔의 적자를 내면서 주주로부터 보전받는 기업과는 경쟁할 생각이 없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3년 전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쿠팡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쿠팡은 롯데의 경쟁상대가 아니라는 단호한 어조까지는 아니었지만 로켓배송을 앞세운 쿠팡의 공격적 행보를 평가절하했다는 점에서 신 회장의 발언은 국내 유통업계에 크게 회자됐다.
당시 롯데는 통합 온라인 플랫폼 롯데온의 론칭을 앞둔 시점이었다. 쿠팡이 벌여 놓은 출혈 경쟁에 합류하지 않아도 그룹 역량만 결집하면 e커머스 시장에서 경쟁력을 충분히 갖출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쿠팡과 롯데온의 매출 격차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벌어졌고, 지난해에는 손실 규모마저 쿠팡이 더 적었다. 매 분기 적자이던 롯데온과 달리 쿠팡은 반기 흑자에 성공했다.
정확히 신 회장 인터뷰 3년 뒤 쿠팡은 전 세계 투자자 앞에서 국내 1위 유통기업이 되겠다고 공언했다. e커머스를 넘어 오프라인까지 아우른 전체 유통 시장에서도 선두가 되겠다는 야심 찬 청사진이다. 이는 롯데가 50년 넘게 쌓아 온 '유통 왕국' 지위까지 넘보겠다는 의미다. 이미 매출 규모에서 롯데그룹 유통 계열사의 합산 매출을 뛰어넘었다. 롯데는 이제 온라인뿐만 아니라 오프라인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쿠팡으로부터 위협받는 처지가 됐다.
롯데의 하향세는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 인터내셔널이 매년 발표하는 '아시아 100대 유통기업 보고서'에서도 드러난다. 롯데가 e커머스 시장에 본격 진입한 2020년만 해도 국내 유통사 가운데 판매액을 가장 많이 기록한 기업이었지만 이듬해 신세계에 선두 자리를 내줬고, 지난해에는 쿠팡에도 밀렸다. 9위이던 아시아 내 순위도 12위까지 떨어졌다. 유통 명가 입장에서 자존심 팍 상하는 일이었다.
롯데도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공략 대상은 가장 취약한 e커머스다. 이를 위해 영국 오카도와 손잡았다. 글로벌 리테일 테크 강자인 오카도의 스마트 솔루션을 도입해서 쿠팡이 선점한 온라인 신선식품 분야에서 전세를 역전하겠다는 복안이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신동빈 회장이 오카도 시스템을 도입한 일본 이온그룹 고위 관계자를 직접 만나 조언을 들었을 정도로 이번 프로젝트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전했다. 절실한 롯데의 마지막 승부수다.
문제는 시간이다. 롯데와 오카도의 협력 모델은 2025년이 돼야 본격화한다. 급변하는 온라인 유통 시장에서 2년은 무척 긴 시간이다. 그 사이 쿠팡은 전국에 자동화 물류 인프라를 구축하고 '쿠세권'도 더욱 공고해졌을 것이다. 역전 골든타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유로모니터는 국내 유통시장이 앞으로 3년 동안 약 100조원 더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이 성장 룸에서 얼마나 많은 점유율을 확보하느냐가 롯데의 운명을 가를 마지막 승부처가 될 것이다.
박준호기자 junho@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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