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그룹의 파산 여파가 이제 갓 발을 뗀 국내 벤처대출 시장에 새로운 위기로 작용하고 있다. 벤처대출이 SVB그룹의 주요 사업모델을 벤치마킹한 모델이기 때문이다. 기업은행 등 정책금융기관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벤처대출 모델이 초기부터 난관에 부닥친 셈이다.
15일 업계에 따르면 현재 국회에 투자조건부 융자, 이른바 벤처대출을 비롯한 다양한 벤처투자기법을 도입하는 내용의 벤처투자촉진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벤처대출은 은행 등 융자기관이 벤처투자를 이미 받았거나 받을 예정인 기업에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주는 대신 소량의 지분인수권을 얻는 제도다. 대출금은 후속 투자자금으로 상환한다. 최근 파산사태가 불거진 SVB그룹의 사업모델을 벤치마킹했다. SVB는 미국 벤처대출 가운데 약 3분의 2를 공급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기업은행이 지난해 말 1000억원 규모로 시범사업을 개시하는 등 새로운 자금공급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다만 법 개정안은 국회 상임위원회 소위원회 중심으로 지난 2년 동안 세 차례 논의했지만 별다른 진척을 보지 못했다. 벤처대출을 비롯한 새로운 투자방식이 생소할 뿐만 아니라 복잡한 구조로 말미암아 벤처투자 주도권이 투자기업이 아닌 금융권으로 넘어갈 수 있는 등 부작용 우려도 제기됐기 때문이다. 3월 국회에서도 일부 상임위 소속 국회의원 중심으로 똑같은 문제가 제기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처럼 2년째 제도 도입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상황에서 SVB그룹 파산 사태가 덮치면서 국회 설득은 더 어려워졌다는 게 벤처투자업계 안팎의 우려다.
벤처투자업계 관계자는 “참고한 미국의 실리콘밸리은행이 파산한 만큼 제도 장점보다는 부작용에 관심이 집중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중소벤처기업부에서도 이 같은 우려를 반영, 국회의원 대상으로 SVB 파산과 벤처대출은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리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중기부 관계자는 “SVB 파산 사태의 원인은 벤처대출이라기보다 고금리, 수신에 비해 작은 여신 규모, 막대한 유가증권 보유 등이었다”면서 “SVB 사태가 벤처대출 도입을 막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SVB 파산 사태는 금융 시스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게 투자업계의 분석이다. 다만 기술기업 자금 조달 여건은 악화 가능성이 짙다.
미국 시장분석업체 옥스퍼드 애널리티카는 “SVB와 시그니처뱅크 자금조달 기반이 특정집단에 집중됐던 만큼 이번 사태는 기술기업에 파장을 야기할 것”이라면서 “벤처캐피털(VC)과 스타트업이 직면한 자본접근 문제를 악화시킬 것”이라고 분석했다.
벤처투자 심리위축 장기화를 우려하는 시각이 우세하다. 국내 대형 벤처캐피털(VC) 상당수가 이달 들어서도 투자 집행을 개시하지 않고 있다. SVB 파산 여파로 관망세는 더욱 길어질 공산이 커졌다.
익명을 요구한 VC 대표는 “당장 SVB 사태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진 외국계 출자자(LP)가 펀드 출자를 줄일 가능성이 짙다”면서 “지금처럼 시장 전반에 자금 공급이 줄고 투자심리가 위축된 상황에서는 벤처대출 같은 융자성 자금이 혁신 벤처생태계에 들어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유근일기자 ryury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