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과 LG 사장은 개인적으로는 만나지 않는다'
산업계 불문율처럼 전해져 온 말이다. 재계 주요 기업의 최고 경영진끼리 만나면 '담합' 문제가 번질 수 있어 만남을 꺼려 왔다는 것이다. 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는 선대 회장이 경쟁사 CEO를 따로 만나지 말라고 주문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과거 삼성과 LG가 액정표시장치(LCD) 가격 담합으로 곤욕을 치른 기억이 강렬한 데다 특별히 경쟁자와의 접점은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경쟁사끼리 손잡는 사례가 늘고 있다. 삼성, LG만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기업 간 협업을 흔치 않게 볼 수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코로나19를 계기로 글로벌 공급망이 붕괴하면서 새로운 산업 지형이 그려진 영향이 클 것이다. 공급이나 물류 불확실성을 감수하고 외국 업체와 거래하느니 다소 껄끄럽더라도 국내 경쟁사와 일하는 게 낫다는 전략적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명분보다 실리와 실익을 우선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했을 것이다.
최근 이목을 가장 크게 끄는 것은 삼성과 LG 간 협업이다. 삼성전자 TV사업부와 LG디스플레이 간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 거래 협상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거래가 아직 이뤄지진 않았지만 성사되면 또 한 번 파격적인 변화로 남을 것이다.
또 과거 유독 삼성 제품을 멀리하던 현대차도 전기차에 삼성 OLED 패널을 탑재하기 시작했고, 반도체 협력 소식도 들려온다.
이 밖에 접점이 없던 LG디스플레이와 SK하이닉스는 확장현실(XR) 기기를 개발하기 위해 기술 동맹을 맺었고, 삼성디스플레이는 범LG로 분류되는 LX세미콘 디스플레이구동칩(DDI)을 쓰기 시작했다. 사례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재계 간 합종연횡이 전통산업보다 주로 IT 전자 산업에 집중된 것도 흥미롭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잘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라는 판단에서다.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필요할 때 경쟁사와도 손을 잡자는 합리적 사업 전략이 주목받는 것은 장려할 일이다.
세계 경기침체 우려 속에 전자·정보통신 시장 상황이 녹록지 않다. 1분기부터 우리 기업들 실적이 걱정될 정도로 줄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불황을 뚫을 혁신 기술 개발로 돌파구를 마련하고 반등 기회를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술패권을 다투는 시대다. 저마다 자국 이익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있다. 모든 걸 자체적으로 다 할 수 없겠지만 글로벌 경쟁에서 우리가 우위에 서기 위해선 국내 산업계가 서로 힘을 합치는 다양한 협력 사례가 더 많아져야 한다.
박소라기자 sr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