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기술지주회사가 지식재산권(IP) 투자에 나서고 있다. 대학이 보유한 기술에 대한 사업화라는 고유 목적에서 특허 확보를 통한 수익 창출까지 역할을 확대하고 있다. 시스템반도체, 바이오, 이차전지 등 국가필수전략기술을 선제 확보해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것 역시 IP 투자에 적극적인 이유다.
20일 창업기획자 공시에 따르면 대학기술지주가 결성한 펀드는 64개에 달한다. 대학기술지주회사는 대학이 보유한 기술과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사업화를 촉진하기 위해 설립된 회사다. 현재 107개 대학이 참여해 81개 기술지주회사를 운영 중이다. 연구개발(R&D) 인프라 지원, 팁스를 비롯한 창업보육 프로그램 진행 등을 주로 펼친다.
2017년부터 유망한 사업 아이템이 있어도 자금이 모자라 창업이 어렵고, 우수한 대학창업기업이 있어도 민간 투자를 끌어내기 어렵다는 현장 의견을 수렴해 교육부는 대학창업펀드 조성 계획을 발표했다. 대학기술지주회사가 창업펀드를 통해 자회사와 기술 유망 기업 등에 투자해 창업 전주기 지원은 물론 향후 지분 가치 상승을 꾀할 수 있게 됐다. 대학기술지주회사에서 창출한 수익은 대학 R&D로 재투자하는 구조가 이어져왔다.
대학기술지주회사는 최근 들어 IP 투자 펀드에 시선을 돌리고 있다. 서울대기술지주는 2020년 '서울대 STH IP 개인투자조합'을 결성한 데 이어 올해 초에는 '서울대 STH IP창업 개인투자조합'을 결성했다. 약 100억원 규모 IP 개인투자조합은 창업 3년 이내 초기 스타트업 중 특허기술을 보유한 지방 소재 스타트업을 중심으로 투자한다.
연세대기술지주는 이달 초 300억원 규모 '연세대학교기술지주 IP펀드'를 결성했다. 한국벤처투자 수시출자사업(특허계정)에 선정돼 모태펀드 180억원을 출자받았다. 연세대기술지주는 약정 총액 40%는 딥테크 유망기업에 투자하고, 60%는 IP 프로젝트에 투자한다. IP 프로젝트는 우리나라 중소기업·대학·공공연구기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지식재산권을 매입해 수익화를 추구한다. 특허를 인수해 기업에 다시 대여하고, 보유 특허를 바탕으로 해외 기업으로부터 라이선스 이용료를 받는 등 IP를 기반으로 수익에 나설 계획이다. 특허를 재산으로 활용해 수익 추구를 모색하는 본격적인 사례다. 연세대기술지주는 2019년 바이오 회사 라파스를 상장시켜 수익을 창출한 바 있다.
고려대기술지주도 정부로부터 R&D 성공 판정을 받은 기업 또는 공공기술 이전 기업에 투자하는 '고려대 공공기술사업화 촉진 개인투자조합 제1호'를 2019년에 결성했다.
대학기술지주회사의 IP 투자 확대는 지식재산권을 미래 산업을 주도할 무기로 인식하고, 국가첨단전략기술을 주도하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지식재산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 핵심요소로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정부 역시 2013년 IP에 기반한 보증제도를 신설하고 IP펀드를 조성하는 등 IP를 투자·거래 대상으로 인식하고 특허에 기반한 자본 조달 통로를 마련해왔다. 2013년 738억원에 불과했던 IP 금융 규모는 2020년에는 전년 대비 52.8% 증가한 2조640억원을 달성했다. 다만 IP 담보 대출이 1조930억원으로 53%에 달하고, IP 보증이 34.3%를 차지하는 등 간접투자 중심으로 IP 금융이 이뤄졌다. IP펀드 비중은 12.7%에 불과하다. 투자대상이 되는 IP의 가치 정보 투명성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IP 보유 기업과 사용기업 간 가치평가 차이로 인한 정보비대칭 문제가 발생한 탓이다.
반면 해외는 IP투자가 활발하다. 미국은 특허관리전문회사(NPE)가 설립한 IP펀드가 다수 존재하고, 이들이 주도하는 IP 소송·인수합병(M&A) 등 투자금융 모델이 고도화됐다. 영국은 민간 영역에서 IP금융을 주도하고, IP가치 평가 전문인력을 통한 IP투자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유럽은 정부주도형 벤처캐피털 펀드를 조성해 자금을 지원한다.
특허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대학기술지주가 보유한 기술역량을 바탕으로 IP 확보를 통해 선제 대응하는 형국이다.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칼텍)가 2016년 애플, 브로드컴 등을 대상으로 와이파이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해 1조원이 넘는 손해배상금 지급 명령을 받아낸 것이 대표적이다. 대학 연구역량을 바탕으로 IP를 보유함은 물론 직접 투자함으로써 지분 가치를 높이고 수익을 창출한다.
대학기술지주회사 뿐만 아니라 기술사업화전문회사 역시 투자 기능을 확대하고 있다. IP를 통한 수익화에 강점을 가진 기술사업화전문회사가 액셀러레이터 라이선스를 취득해 투자를 확대하는가 하면 벤처펀드에 공동운용사로 이름을 올리는 사례도 속속 등장한다.
최근 액셀러레이터 등록을 마친 한 사업화전문회사 대표는 “딥테크 분야가 주목받으면서 어떤 IP가 사업화를 거쳐 현실화될 것인지 내다보는 전문성이 필요하다”면서 “단순 재무목적(FI) 투자사가 아닌 전략적투자자(SI)로서 지원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판단으로 투자 업무를 병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기술지주회사의 IP 투자 확대는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차정훈 카이스트홀딩스 대표는 “IP 생성·사업화 등 생태계 전반이 모두 제각기 다른 영역에서 작동하고 있다”면서 “수많은 IP 가운데 정말 가능성 있는 IP를 찾아내고 아이디어 차원의 IP를 어떻게 서비스화 시킬 것이냐가 가장 큰 숙제인 만큼 다양한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지현 연세대기술지주 대표 역시 “새로운 길을 열고 있는 만큼 대학기술지주회사의 IP 기술사업화 대표모델로 자리매김하겠다”고 밝혔다.
송윤섭 기자 sy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