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연구개발(R&D) 예산이 절반으로 줄었어요.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난감합니다. 요즈음 내부 회의에서 가장 많이 하는 나오는 말이 과제 드롭(포기)이예요.”
최근 산업 현장에서 만난 국가 R&D 사업 수행 기업·기관 관계자들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특히 대화 중에 등장하는 '예산'이라는 단어는 시쳇말로 '발작버튼'이다.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답답한 속내를 드러내며 하소연을 시작했다.
정부가 지난 9월 국회에 제출한 내년도 R&D 예산은 25조9152억원이다. 올해와 비교해 16.6% 줄었다. R&D 예산이 전년 대비 감소한 것은 1991년 이후 33년만이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지적한 '나눠 먹기·갈라 먹기 형태 R&D'를 걷어내려는 조치로 보인다.
하지만 국가 R&D 사업에서 몇년간 '계속과제'를 수행하는 주체들은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았다. 내년 예산이 크게 감소하면서 그동안 수행한 R&D 과제를 한순간에 날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돈다.
현재 정부 R&D 과제에 참여하고 있는 한 관계자는 “정부가 매년 수억원을 지원하기로 한 예산이 50%나 줄어든다”면서 “사전 대비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과제를 계속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토로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추진 중인 중견·강소기업 육성 프로젝트 '월드클래스 플러스'가 이 같은 사례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의 박영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애초 479억원었던 월드클래스 플러스 사업의 내년도 예산은 정부안에서 66.8% 줄었다.
이 같은 정부의 예산 삭감 기조가 국가 R&D 사업 신뢰성에 타격을 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통과하면서 정책적 타당성을 확보한 사업조차 애초 계획한 R&D 예산을 유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계속과제를 수행하는 기업은 예산 감소에 따른 경영 리스크를 떠안아야 한다. 기술 개발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부족한 예산만큼 사재(社財)를 털어야 하지만 부담이 너무 크다. 하향 조정된 예산을 아껴가며 과제를 이어간다고 해도 제대로 된 연구를 진행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새는 혈세를 아껴야 한다는 정부 입장은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이 같은 방침이 꼭 필요한 R&D의 부실로 이어진다면 산업 경쟁력 저하로 귀결될 뿐이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R&D 예산과 관련해 필요한 사업 일부에서 추가 증액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환영할만하다. 정부가 산업계 상황을 충분히 살펴 적소에 예산을 투입하기를 바란다.
윤희석 기자 pionee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