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을 겪은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이 내년에는 증액으로 선회하는 분위기다.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있다. 예비타당성조사 기준 현실화다.
총 사업비 500억원 이상·국고 지원 300억원 이상 사업의 정책·경제적 타당성을 사전 검증하는 예타 제도는 소규모, 단기 R&D 사업 남발이란 부작용을 낳았다. 부처 입장에선 까다로운 예타 기준에 해당하지 않는 정도로만 개별 R&D 사업을 기획해야 신속하게 이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에 따르면 2022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산업통상자원부 R&D 사업수는 각각 343개, 238개다. 중소벤처기업부(49개)까지 포함하면 정부 총 R&D 사업(1337개)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세 부처는 현재 유사·중복 R&D를 통합하고 있는데, 그러면 예타를 거쳐야 하는 숙제가 발생한다.
일본은 300억엔(약 2680억원) 이상 R&D 사업에 대해 부처별 사전평가를 실시한다. 영국은 재무부 승인이 필요한 R&D 프로젝트 기준이 예산 1억파운드(약 1680억원)다. 미국은 기준 없이 각 부처가 자체적으로 타당성을 검토한다.
한국만 1999년 예타 제도 도입 당시 기준인 500억원에 머물러있다. 그 사이 국가 재정 규모가 두 배 이상 증가했음을 생각하면 기준 현실화가 시급하다.
중요한 것은 정부 의지다. 과기부는 지난 2022년 9월 국가연구개발사업 예타 제도 개선방안을 발표하며 예타 기준 1000억원 상향을 중점 과제로 제시했다. 'R&D 예산 삭감 후폭풍'을 겪고 올해 1월 다시 발표한 개선방안에는 예타 기준 상향 내용이 사라졌다.
대통령실은 지난주 혁신선도형 R&D를 중심으로 한 예산 증액을 약속했다. 현행 예타 기준으로 예산만 늘리는 것은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처럼 어폐가 있어보인다. 현실을 반영한 제도 정비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송윤섭 기자 sy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