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을 넘어 마음을 울리는 창의
시각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자. 1969년 22살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TV 단편 아이즈(Eyes)를 연출했다. 뉴욕 고급주택가 노년의 부유층 여인이 주인공이다. 미술품 수집가인 그녀는 자신의 수집품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왜일까. 선천성 시각 장애 때문이다. 자신의 미술품을 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다. 당시 안구이식은 어려운 수술이고 성공해도 약 11시간밖에 빛을 볼 수 없다. 그녀는 의사와 안구 기증자를 매수하여 이식 수술을 강행했다. 수술로 눈을 뜬 그녀는 샹들리에 불빛을 잠깐 보지만 순식간에 세상은 암흑으로 바뀐다. 뉴욕은 등화관제 훈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들었던 그녀가 다시 눈을 뜨자 해가 뜨고 있었다. 11시간이 끝나가는 마지막 순간에 길을 나서지만 추락해 죽는다.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도 보자. 거의 모든 시민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전염병에 걸리듯 시력을 잃게 되는 이야기다. 사악한 인간성과 붕괴된 사회의 모습을 그렸다. 몸이 100냥이면 눈은 90냥이다. 시각을 잃는 것은 생존에 치명적 위험을 가져오고 삶을 나락으로 떨어트린다. 생각만 해도 두렵다.
시각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가장 필요하고 효과적인 인터페이스다. 시각이 있기에 위험을 피할 수 있고 생존 활동을 할 수 있다. 인간의 창의도 시각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자동차, 개인용 컴퓨터, 스마트폰과 동영상 등 각종 서비스를 공급함에 있어 고객의 시각을 전제로 했다. 시각에 청각 등 감각을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여 시너지를 높였다. 음식은 인간이 시각과 후각을 통해 접하고 미각을 통해 즐긴다. 음식을 먹는 동영상을 보여주는 '먹방'은 미각을 시각으로 전환하여 즐긴다. 시각을 넘어 청각, 후각, 촉각 등 다양한 감각을 복합적으로 결합하는 창의가 중요하다. 음식을 손으로 집어 먹는 문화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원시적이고 불결한가. 아니다. 손으로 음식을 느낄 수 있는 촉각은 또 다른 즐거움을 줄 수 있다. 음식은 촉각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무언가를 더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 앨런 머스크가 개발한 '뉴럴링크'는 어떨까. 사지 마비 환자가 뇌에 부착한 칩으로 뇌파를 이용해 시각, 청각, 촉각을 대신하거나 증폭하는 활동을 할 수 있다. 고령층 또는 중증 장애인에 대한 복지를 넘어 인류사적 의미가 있는 인간 친화 기술이다.
감각에 관한 창의의 발전은 크게 두 방향이다. 첫째, 과학기술을 통해 잃어가는 감각을 일깨워 지원하고 증폭하는 것이다. 인간의 감각이 강하고 다양할수록 삶은 역동적이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고령 또는 장애가 있어도 세상과 효과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자본주의 시장은 인간의 감각이 잘 작동하는 것에 비례하여 성장한다. 둘째, 시각 중심에서 벗어나 다양한 감각을 찾고 합쳐 창의를 높여야 한다. 과거 TV프로그램 중 안대를 눈에 두르고 투명한 유리상자 속에 손을 넣어 그 안의 물건을 만져 알아맞히는 게임이 있었다. 추억이 담긴 장난감, 신발 등 다양한 것을 만질 때의 감각을 기억한다. 사랑했던 가족의 숨결, 따뜻한 몸, 함께 했던 곳 등 느낌은 어떨까. 추억이 깃든 냄새는 또 어떤가. 고향의 산, 들, 논, 밭의 나무, 꽃, 곡물 냄새와 집에서 아침, 저녁으로 흐르는 사람, 음식 냄새다. 그런 감각에 호소할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한 때 4D 영화관이 유행한 적이 있다. 영화 콘텐츠에 맞게 바람이 나오고 의자가 흔들리고 향기가 난다. 시각 외에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감각을 결합하여 연결하고 완전히 새로운 감각을 찾아야 한다.
창의는 말초 감각에만 의존하거나 충족하는 것에 그쳐선 안된다. 시각 중심에서도 벗어나 다양한 감각을 창조해야 한다. 마음 속 깊은 곳을 울리는 느낌 또는 심각('心覺')을 건드리는 창의만이 미래에 살아남는다.
법무법인 태평양 이상직 변호사('디지털 생활자'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