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은 무책임하다.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추상적으로 표현한다. 대상 자체가 없는 작품도 있다. 제목이 없다고 제목을 붙인 작품(무제, Untitled)은 어떨까. 힘겹게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쉽지 않다. 관객과의 소통을 포기한 걸까.
작가 질리언 웨어링을 보자. 길에서 만난 50여명의 낯선 사람에게 그 순간의 심정을 종이에 적으라고 했고 그것을 들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다른 사람이 내게서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는 제목으로 출품했다. 경찰관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도와줘'(HELP)라고 적은 종이를 들고 있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직업을 가진 경찰관은 누구의 어떤 도움이 필요했던 걸까.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나는 대충 살고 있다'(MY GRIP ON MY LIFE IS RATHER LOOSE!)고 휘갈긴 종이를 들었다. 굳은 얼굴에 뱀 문신을 한 남자는 '나는 살짝 돌았다'(I HAVE BEEN CERTIFIED AS MILDLY INSANE)고 적은 종이를 들고 있다. 압권은 넥타이에 정장을 멀끔하게 차려입고 멋진 미소를 짓는 젊은이다. '나는 절박하다'(I'M DESPERATE)고 쓴 종이를 들었다. 일자리를 잃은 걸까. 관객은 궁금증과 함께 작품에 빠져든다. 작가와 작품은 사진속 주인공을 배려하고 위로한다. 관객은 작품에서 자신의 처지를 되새기며 배려와 위로를 받는다.
작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는 79.3kg의 사탕을 전시장 구석에 쌓아놓았다. 관객은 그 사탕을 먹기도 하고 가져가기도 했다. 그날 전시가 끝나면 다음 날을 위해 줄어든 사탕만큼 채워 놓는다. 79.3kg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민자, 성소수자인 그가 후천성면역결핍증에 걸리기 전 건강했던 몸무게다. 관객은 사탕을 먹고 가져가면서 그의 아픔을 공유한다. '무제(완벽한 연인)'도 그의 작품이다. 동그랗고 하얀 벽시계 2개가 나란히 벽에 걸려 있다. 건전지를 동시에 넣었지만 수명에 따라 두 벽시계의 시간은 달리 흐른다. 언젠가 하나가 멈추고 다른 하나가 뒤따른다. 질병, 죽음, 사회적 편견이 연인을 갈라놓은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준다. 작가는 작품을 기획하고 만들고 출품하며 배려와 위로를 받고, 관객은 자신의 처지로 치환하여 배려와 위로를 얻는다.
작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어떤가. 관객과 마주앉아 눈빛을 교환하는 행위예술을 했다. 첫날 그녀가 감았던 눈을 뜨자 중년 남자가 앞에 앉아 있다.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30년 전 헤어진 연인이다. 침묵이 흐르고 눈물이 흘렀다. 손을 맞잡은 장면은 관객의 마음을 적셨다. 작가와 관객은 작품을 통해 배려와 위로를 받는다.
예술작품은 유리, 액자, 접근제한 경고문을 통해 경계를 획정함으로써 관객이 작품을 만지거나 접촉할 수 없다. 작품의 훼손을 막기 위함이다. 물론 그림, 도자기, 조각 등 작품을 만지며 질감을 느낄 수 있는 전시도 있다. 촉각으로 느끼는 것은 또 다른 감동을 준다. 접촉 그 자체가 훼손은 아니다. 아름다운 접촉은 서로를 이해하는 배려와 위로다. 접촉을 통해 우수한 소수의 '개체' 중심에서 배려와 위로가 개입된 '관계'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 개체 중심은 그 개체의 성공을 조직의 성공으로 착각한다. 개체 중심으로 조직을 끌면 단기적 성과가 있을 수 있지만 실질적 장기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접촉을 통해 배려와 위로로 이뤄진 관계는 다르다. 자신의 단점을 동료의 장점으로 보완하고, 자신의 장점으로 동료의 단점을 보완한다. 조직의 인프라를 단단히 하고 시너지를 높인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물건 팔고 돈 받는데 그치지 말자. 기업의 존재이유와 가치를 고객이 알고 사랑에 빠지게 해야 한다. 훌륭한 상품은 매출증가를 넘어 고객과 신뢰로 연결되고 공동체 가치를 높인다. 딱딱한 거래에 배려와 위로를 더하면 공동체를 꽃피우는 창의가 된다.
법무법인 태평양 이상직 변호사('디지털 생활자'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