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때가 있었나 싶다. 우리나라 반도체·디스플레이 장비가 첨단 공정에 진입하고, 그것도 모자라 글로벌 기업으로부터 구애를 받은 적 말이다. 그동안 남의 나라, 특히 일본이나 미국 정도의 얘기로만 알았던 주인공이 우리나라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바로 한미반도체와 선익시스템이다.
한미반도체는 전 세계 열풍이 불고 있는 인공지능(AI) 반도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업이 되고 있다. AI 메모리로 불리는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만드는 데 이 회사 장비가 필수로 자리매김하고 있어서다.
'TC 본더'라 불리는 한미반도체의 장비는 열을 가해 여러 개의 반도체(셀)를 붙이는 것이다. HBM이 D램을 적층해서 만들기 때문에 이를 부착하는 장비는 HBM 제조에 필수고, 품질은 물론 생산성이 이 장비로 결정난다.
본딩 장비는 네덜란드 베시, 일본 신카와 등이 주도했다. 그런데 2017년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한미반도체가 SK하이닉스와 손잡고 전보다 생산량을 두 배 이상 증가시킨 '듀얼 TC 본더'를 공동 개발하면서다. 양산능력에 따라 승부가 갈리는 반도체 산업에서 동일 시간에 두 배 이상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되자 SK하이닉스는 HBM 시장을 석권했다. AI 반도체 1위 엔비디아는 SK하이닉스 HBM을 독점적으로 사용했다.
반도체 업계 시선은 자연스럽게 한미반도체로 쏠렸다. SK하이닉스에 이어 미국 마이크론이 한미를 찾았다. 한미반도체는 지난 11일 마이크론과 226억원대 HBM 장비 공급 계약을 맺었다. 업계에 따르면 마이크론은 그동안 다른 회사 장비로 HBM 제조를 준비하고 있었다. 상당 수준 투자도 진행됐다. 그러나 경쟁력 제고를 위해 원점 재검토에 나섰고, 그래서 찾은 것이 한미반도체다. 마이크론 HBM의 운명을 한국 장비에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인 데,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사에 굉장히 낯선 풍경이다.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핵심적인 장비사로 부상하고 있는 곳은 선익시스템이다. 이 회사는 8.6세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 증착기 상용화를 목전에 두고 있다. 중국 최대 디스플레이 업체인 BOE가 선익시스템 증착기 도입을 추진 중이다. 최근 열린 BOE 착공 행사에 선익시스템이 초청 받아 수주확정단계로 보인다.
증착기는 디스플레이 제조에 있어 핵심 중의 핵심이다. OLED는 유기물을 사용하는 디스플레이로, 유기물을 화소(픽셀)로 만드는 공정이 증착이고, 이를 실현하는 장비가 바로 증착기다. 우리나라가 OLED 양산에 성공하며 세계 시장을 주도했지만 증착기, 마스크(FMM)는 전량 해외 의존했다. 특히 OLED 증착기는 그동안 일본이 독식했다. 선익 계약이 체결된다면 특정 기업이 지배하는 핵심장비의 독과점을 깨는 한국 디스플레이 장비 역사의 첫 사례이자 쾌거다.
우리나라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장비 산업 경쟁력은 글로벌 수준에 크게 못 미친다는 평가가 많다. 기업 규모, 연구개발 투자, 인력 등 객관적 수치면에서 차이가 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묵묵히 연구개발하고 차별화된 기술을 확보하려 애쓰는 곳들이 적지 않다. 이들의 노력은 제대로 평가 받아야 한다. 그래야 ASML이나 캐논토키와 같은 세계적 장비 기업이 우리나라에서도 나온다.
윤건일 기자 beny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