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개발 등 바이오·의료 분야 벤처캐피털(VC)이 투자금 회수에 나서기 시작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바이오·의료 분야 주식이 연이어 상승세를 타면서다. 기업공개(IPO) 문턱이 높아진 가운데 펀드 만기 도래 등 자금 회수 수요가 커지면서 우회로를 찾는 분위기다.
투자업계에 따르면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하이트론씨스템즈는 지난 9일부터 11일까지 3거래일 연속 상한가를 기록하고 있다. 지난 6일 장 마감 이후 신약개발 비상장사인 지피씨알의 경영진을 회사의 사내이사로 선임한다는 내용의 주주총회소집 결의를 공시한 뒤인 9일부터 이어진 상한가다.
이후 9일에는 지피씨알 창업자이자 대주주인 신동승 대표 및 임원진과 지피씨알에 투자한 VC를 대상으로 한 영구채 발행 공시까지 이어지며 상승세에 기름을 부었다. 하이트론 주가는 지난 6일 954원에서 11일 현재 2095원으로 사흘간 2배 이상이 뛰었다.
하이트론씨스템즈는 1986년 설립된 보안업체다. 1998년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한 뒤 2021년 창업자 전 최영덕 대표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사모펀드 등으로 수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결국 지난해에는 회생절차까지 거쳤다. 이 과정에서 전환사채(CB) 등 자금거래에 대한 실체가 없다는 이유로 감사인으로부터 감사의견을 거절당하는 등 논란이 적지 않았다.
사실상 껍데기만 남아 상장을 유지하고 있는 기업의 주가가 이처럼 폭등한 이유는 표적항암제 개발 업체인 지피씨알 지분을 인수한다는 소식 때문이다. 하이트론은 지피씨알 인수를 위해 900억원에 가까운 규모의 자금조달 계획을 공시했다. 하지만 신규 조달할 자금 대부분은 지피씨알의 임원진과 VC 등 기존 주주가 대상이다. VC들이 CB 물량을 모두 전환하더라도 신 대표는 최대주주로 남는다. 사실상 지피씨알이 역으로 하이트론을 사들이는 구조다.
투자업계 안팎에서는 하이트론이 지피씨알에 투자자의 자금 회수를 위한 우회로로 쓰인 것으로 보고 있다. 자금조달을 위해 발행한 영구채가 하이트론 정도 규모 회사에서 감당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 1년 이후에는 얼마든지 보통주로 전환이 가능해서다. 합병 절차가 없는 만큼 금융당국으로부터 증권신고서 심사를 얻을 필요도 없다. 지피씨알 투자자 역시도 이번 자금조달 절차가 규정 상으로는 우회상장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벤처투자업계 관계자는 “2022년 무렵 상장을 추진했던 바이오 업체들이 최근 줄이어 상장을 타진하고 있지만 거래소와 금감원의 심사 문턱이 높아지면서 IPO 자체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면서 “지피씨알 역시도 앞서 상장을 추진하다 철회를 결정한 만큼 펀드 만기를 앞둔 VC 등 투자자 입장에서도 빠른 자금 회수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앞서 코스닥 시장에 세 번째 상장을 도전한 바이오 업체 아리바이오는 결국 상장을 철회한 뒤 지난달 조명업체인 소룩스와 합병해 증시에 입성하는 방안을 택했다. 소룩스와 아리바이오의 합병은 현재 금감원의 증권신고서 심사를 남기고 있는 단계다.
류근일 기자 ryury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