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 위대한 산업을 향해]<2>세상을 바꾸다(중)한국 정치와 사회를 바꾼 힘

 조윤순 콜루브리스네트웍스 사장(47)은 얼마전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를 봤다.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났는지 새삼 화가 치밀었다. 문득 자신을 포함해 ‘당시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던가’ 의문도 생겼다. 동시에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했다면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과거 부정선거나 여론왜곡 등은 이제 상상조차 할 수 없으며, 사회 구석구석의 부조리가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때론 네티즌의 무분별한 공격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만큼 투명한 사회가 되었다는 반증 아닐까요.”

조 사장의 말마따다 통신은 우리 사회 변동에 일조했다. 권위주의적이고 폐쇄된 사회에서 민주적이고 열린 사회로 나아간 그런 변화의 속도를 더 빠르게 했다.

2000년대들어 특히 그러했다. 불과 몇년만에 초고속 인터넷을 쓰는 가구 1400만, 이동전화 가입자 4200만명에 도달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통신의 급속한 보급은 우리 사회를 더욱 다원화시켰다. 같은 관심사를 가졌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만난다. 희귀병 환자를 둔 부모들의 모임, 와인 동호회 등이 인터넷 카페를 통해 정보를 공유한다. 마을, 학교, 직장과 같이 일정 공간에 머물렀던 사회 관계의 지평을 훨씬 넓혔다. 개인화도 촉진시켰다. 개인마다 전화번호와 IP주소를 갖게 되면서 대면 문화가 줄어들었다.

정치 커뮤니케이션의 양식도 바꿔놓았다. 정치 행위에 수동적인 일반인들이 대선과 촛불시위에서 보듯 이동전화와 문자메시지,e메일을 통해 정치에 참여했다. 인터넷과 모바일 미디어를 활용해 정치에 적극 개입하는 이른바 ‘영리한 군중(Smart Mob)’이 우리나라에 정착했다.

각종 정보가 인터넷에 까발려지면서 부적절한 정치 행위가 설 자리를 잃었다.

휴대폰이나 디지털캠코더로 찍은 영상이 불과 한시간도 채 안 돼 전국 방송망을 타는 일도 나타났다. 통신이 아예 미디어 역할까지도 하는 시대 이 모든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통신 인프라가 낙후한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다.

이호영 KISDI 박사(사회학)는 “통신의 발달이 없었다면 매스미디어 논리에 의해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묻히고 문화적 다양성이 실현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이런 관점에서 통신은 사회를 풍요롭게 하고 사회적 연결망을 확대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물론 넘쳐나는 통신수단에도 소외를 더욱 심하게 만들며, 사이버테러가 자살을 불러오고 개인정보 유출과 같은 사회 문제도 일으키는 부작용이 없는 건 아니다. 휴대폰이 없거나 인터넷이 안되면 심각한 불안 증세를 보이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부작용도 그러나 이동성과 정보접근성 제고, 일방향 커뮤니니케이션 개선과 같은 순기능을 덮지 못한다.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순기능을 극대화하는 게 우리 통신업계와 정책 당국자의 과제인 셈이다.

조윤순 지사장은 통신이 우리 사회에 준 가장 큰 영향을 ‘믿음’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통신을 한자로 풀면 믿음이 통한다는 뜻인데 믿음을 가지려면 직접 보고 듣고 느껴야 할 것입니다. 한참 지난 일을 내가 다른 경로를 통해 전달받으면 과연 믿음이 생길까요? 통신은 빨라야 하며,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통해야 합니다. 통신이 더 발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신화수기자@전자신문, hsshin@ 김태권기자@전자신문, tkkim@

◆전화가 권력형 비리의 온상이었다고?

 홍은동에 사는 주부 박수진(48)씨. 집안에 있는 전화와 가족들의 휴대전화를 모두 합하면 무려 7대다. 집전화 2대에다 휴대폰이 남편 2대, 박씨 본인과 아이들 3대 등이다. 4인가족 기준으로 요즘 어떤 가정이든 유무선을 포함해 최소 3∼4대씩은 갖고 있는게 보통이다. 길거리에는 공중전화, 까페에는 서비스 전화, 회사에는 구내전화…전화가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데 불과 수십년전만해도 전화 한대를 놓기위해 줄을 서고, 로비까지 해야했던 시절이 있었다. 1962년 동대문전화국에서 실시한 전화가입권 공개추첨에는 발디딜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선거유세장을 방불케했다. 작가 이기열씨에 따르면 1960년대 초반에는 전화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심각했다고 한다. 서울중앙전화국이 1960년 1월부터 1년 5개월을 조사한 결과 6000여건의 전화 개통건수 가운데 정상적인 개통은 530건에 불과했고 나머지 5500건은 장·차관, 경찰·검찰, 국회의원 등을 통한 로비로 이뤄졌다. 체신부 간부를 힘으로 누르거나 전화국 직원과 결탁해 전화가입권을 따낸 권력가들은 그것을 웃돈을 얹어 팔았다. 전화를 빌려주고 월세를 받는다든지, 전화가입권을 담보로 한 대여업, 매점매석 등도 성행했다. 대통령까지 나서 전화로 인한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라고 직접 주문할 정도였다. 그래서 나온 대책이 청색전화(판매·양도를 금지한 새로 가설하는 전화)와 백색전화(자유롭게 팔 수 있는 이미 가설한 전화)의 분리다. 판매가 가능한 백색전화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50평짜리 집값이 230만원이었는데 전화 한대가 260만원까지 뛰었으니 얼마나 귀한 몸이신지 알 만하다. 참여와 개방 문화를 확산시킨 통신이 수십년전만해도 오히려 권력형 비리의 온상, 심각한 사회문제의 대상이었던 적도 있다고하니 참으로 까마득한 옛날 얘기다.

조인혜기자@전자신문, ih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