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국의 제조업 경쟁력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후방 산업 인프라다. 소재·부품·장비가 완제품의 부가가치로 승화되고 그 성과가 온전히 후방 산업과 다시 공유될 때 제조업의 강한 체질과 산업 전반의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 특히 장비는 소재-부품-완제품 공정 단계에서 각각 최고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생산 기술의 총아다.
그동안 반도체·디스플레이·태양광 등 우리나라가 주도하는 부품 산업에서 장비가 차지하는 위상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설비 투자 의존도가 워낙 커 장비 산업 그 자체로 많은 부가가치와 시장성, 기술 장벽을 지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반도체·디스플레이 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던 것도 상당수 장비를 국산화하면서 생산 기술을 쌓아온 덕분이다.
장비 산업은 그러나 최근 일대 위기를 맞았다. 지난 1∼2년간 LCD·태양광 산업은 극심한 불황에 허덕이며 사실상 설비 투자가 실종됐다. 장비 업계의 수주 가뭄은 당장 실적 악화, 나아가 경영난으로 현실화하고 있다. 한때 반도체 쪽의 설비 투자가 위축되면 디스플레이 쪽이 만회하는 식의 시장 주기적 보완 공식도 깨진 지 오래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리 머지않은 미래가 벌써부터 걱정스럽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중국의 첨단 산업 설비 투자다. 중국은 근래 수년간 디스플레이·반도체·발광다이오드(LED)·태양광 산업 제조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방대한 국가 자본을 투입했다. 세계적 수급 여건과 시황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가 중국에 첨단 팹을 진출시켜야 하는 것도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장비 업계로선 향후 사라질 국내 투자 대신 중국 시장만 바라본다. 어느 순간 동반 몰락하는 처지에 놓일 수도 있다.
이 와중에 얼마 전부터 고개를 든 또 하나의 이슈는 국내 장비 업계를 더욱 긴장시키고 있다. LG전자 생산기술원이 분사까지 염두에 두고 그룹 내 장비 개발·구매 창구 단일화를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겉으로야 생산 기술 경쟁력 강화와 구매 효율화를 위해서지만, 삼성과 더불어 거대 수요처인 LG의 장비 협력사에는 또 다른 `갑`이 등장하는 격이다.
앞으로도 장비 산업의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국내 업계는 지금 영속 가능한 후방 산업으로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변화의 시기가 늘 그렇듯 새로운 돌파구와 자생력을 갖추는 일은 스스로의 몫이다. 하지만 미래 제조업과 장비 산업을 생각하면 대기업의 역할이 더 강조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LG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는 이유다.
서한 소재부품부장 hse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