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전염병 등 질병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데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 아프리카 등 신흥국 사람이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조차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이유다.
그러나 정보기술(IT) 발달로 질병을 진단하고 항생제 처방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는 방법이 나오고 있다. 그 중심에 바이오 반도체가 있다.
여러 질병을 손쉽고 저렴하게 진단할 수 있는 바이오 반도체만 상업화된다면 통신기기와 연동해 원격으로 처방하고 치료할 수도 있다. 미국 국가 연구기관에서는 이러한 진단·치료 시스템을 연구하고 있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반도체와 바이오 기술은 독자 영역에서 발전해왔다. 바이오 연구자와 반도체 전문가가 만날 기회도 적었고 논의할 이슈도 드물었다.
두 영역 간 경계의 벽이 허물어 진 것은 최근 융합IT시대가 본격화되면서부터다. 현재 바이오 기술과 반도체 융합은 인류 역사상 유례 없이 활발하다. 바이오와 반도체 융합은 앞으로 무궁무진한 새 시장을 창출할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올해 세계 바이오 반도체 시장은 70억달러 규모를 형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오는 2015년에는 86억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미국·유럽이 세계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는데 최근 아시아 기업·연구소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 한중일 3국 연구개발(R&D) 수준이 그만큼 높아졌고 반도체 인프라도 아시아에 집중된 영향이 크다.
현재 상업화에 가장 근접한 쪽은 반도체 진단 기술이다. 암·바이러스 등 특정 물질에 반응하는 단백질을 반도체 위에 도포하고 소량의 혈액을 뿌리면 항원·항체 반응하면서 전기신호가 발생하는 원리다.
기존 형광체 시약은 다량의 혈액이 필요하고 한 번 시험에 한 가지 질병 밖에 확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바이오 반도체는 한 번에 두세 가지 질병을 파악할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하다. 피코몰 혹은 펨토몰 수준의 소량으로도 질병을 검출할 수 있고 10분 내외 빠른 진단도 가능하다.
우리나라는 시모스(CMOS) 반도체 기술력이 뛰어나 후발주자임에도 많은 성과를 일궈냈다. 반도체 산업 인프라가 풍부하고 미세공정 분야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독일 등 바이오 반도체 강국과 더불어 상업화 수준에 근접한 나라로 꼽힌다.
이상대 아이엠헬스케어 사장은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해 바이오 반도체 개발이 늦은 편”이라며 “반도체 미세 공정에서 앞선 기술을 확보했고 은나노와이어 등 특정 분야에 집중한 결과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바이오 반도체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지만 당장 해결해야 할 기술적 난제도 많다.
최근 국내외 연구진은 혈액 속 소금(염분) 때문에 바이오 반도체 상용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염분은 이온 상태에서 반도체에 노이즈를 줘 진단 정밀도를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혈액 속 염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상용화 시점은 당초 기대보다 훨씬 지연될 공산이 커졌다. 업계 전문가는 “혈액 속 염분 함량을 줄이거나 염분 이온 영향을 회피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방안이 효과적”이라며 “보완 기술만 갖춘다면 상용화 자체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방법 자체에 회의적 의견을 보이는 전문가도 많다. 혈액 속 염분을 처리하려면 비용 부담이 커지고 진단 성능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바이오 반도체를 조기 상업화하려면 기술 난이도가 높은 의료용보다 식품·환경 등 쉬운 영역부터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건강에 관심이 고조되면서 젖산·콜레스트롤 외에도 환경오염 물질을 검출할 수 있는 바이오 반도체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현재 반도체 노광 기술로는 10㎚대 선폭을 구현하기 어렵다. 극자외선(EUV) 노광기술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상용화까지는 최단 4~5년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미세공정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바이오 기술이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마쓰시타는 최근 일본 나라선단과학기술대학(NAIST)과 페리틴 단백질을 활용한 메모리 소자 개발에 성공했다. 페리틴은 여러 분자가 공 모양으로 구성된 큰 분자다. 페라틴 내부에 지름 7㎚의 빈 공간이 있다. 여기에 금속 이온을 포함한 수용액을 채운다. 실리콘 기판 위에 페리틴 분자를 바르고 자외선으로 단백질을 제거하면 미세 금속 패턴이 구현된다. 미국 캠브리오스도 단백질 구조를 활용한 반도체 미세 패턴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반도체 공정 분야 전문가는 “바이오 기술을 활용하면 미세 패턴뿐만 아니라 3차원 반도체에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며 “비싼 노광 공정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연구개발에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이형수기자 goldlion2@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