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189>진대제 정통부 장관

“여러 사람이 진대제 사장이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가장 적임이라고 추천했습니다. 앞으로 10년, 15년 뒤에 우리나라 국민이 먹고살거리를 정부에 와서 만들어보면 어떻겠습니까.”

2003년 2월 27일 오전 11시께.

진대제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총괄 사장(현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 회장)에게 청와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노무현 대통령 전화였다.

진 사장은 당황했다. 그는 언론에서 유력한 정통부 장관 후보로 거명됐고 삼성그룹 회장실을 통해 간접 입각 의사를 타진해 왔을 때 한마디로 딱 잘라 고사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직접 전화해 장관직을 제안한 것이다. 짧은 순간 온갖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어떻게 해야 하나.

산간벽촌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때부터 국가 장학금으로 공부해 오늘의 위치에 오른 진 사장이었다.

진 장관의 증언.

“대통령이 그냥 막연하게 장관직을 제안한 게 아니라 ‘정부에 와서 10년, 15년 뒤 우리 국민이 먹고살거리를 만들어보자’는데 어떻게 거절합니까. 모든 게 운명이고 국가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짐을 지기로 결심했다.

“알겠습니다. 국가를 위해 봉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명예와 부(富), 실력의 삼박자를 갖추고 잘나가던 진 사장의 ‘공익근무(公益勤務)’는 이렇게 시작했다.

전화를 끊은 진 사장은 아내에게 노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과 입각 승낙 사실을 알렸다.

그는 수화기를 놓자 삼성그룹 회장실로 올라갔다. 이건희 회장(현 삼성전자 회장)은 해외에 머물고 있었다. 이학수 그룹 회장비서실장(삼성전자 부회장 역임, 현 삼성물산 고문)에게 자신의 선택을 설명했다. 이 실장은 “그룹의 기본방침은 본인이 입각을 원하면 막지 않는 것”이라며 “축하한다”고 말했다.

진 사장의 정통부 장관 발탁은 남궁석 전 삼성SDS 사장(작고, 새천년민주당 정책위 의장, 국회 사무총장 역임)에 이어 두 번째 삼성 출신 장관이었다.

잠시 후 진 사장에게 정찬용 인사보좌관(청와대 인사수석 역임, 현 인재육성재단 이사장)의 전화가 왔다. “오후 두 시 임명장 수여식에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진 사장이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하자 “이미 검증해 봤고 아들 이중국적 문제는 고려사항이 아니다”고 말했다. 정 보좌관은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그는 오후 2시 청와대 본관 충무홀에서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았다.

청와대에도 회사 차량을 타고 갔다. 어디로 가는지 잘 몰라 청와대에 가서 물어 본관 2층 충무홀로 들어갔다.

진 장관의 증언.

“당시 경황이 없어 뭘 어떻게 했는지 거의 기억이 없습니다. 취임식이 끝나고 정통부로 올 때도 삼성 차량으로 왔습니다.”

서울 광화문 정통부 청사에 도착한 진 장관은 현관에서 남궁민 총무과장(우정사업본부장 역임, 현 한국산업기술시험원장)의 영접을 받았다. 의전은 총무과장 소관업무였다.

남궁민 당시 총무과장의 말.

“정통부 입구에서 진 장관을 안내해 장관실로 모셨습니다. 정통부로 오실 때 삼성 측이 수행했습니다.”

진 장관은 김태현 차관(정보통신진흥연구원장, 하나로텔레콤 회장 역임)을 비롯한 실·국장들과 인사를 나눈 후 장관실에서 차를 마시며 잠시 환담했다. 이어 오후 4시 30분 정통부 14층 대회의실에서 취임식을 갖고 공직자로서 업무를 시작했다.

진 장관은 정통부에서 작성한 취임사를 그대로 읽었다.

취임사는 류필계 당시 공보관(정통부 정책홍보관리본부장 역임, 현 LG유플러스 부사장)이 작성했다.

류필계 공보관의 말.

“새 장관 취임에 맞춰 사전에 공보관실에서 취임사를 준비했습니다. 진 장관이 별도 주문을 하지 않아 취임사 내용에 변동은 없었습니다.”

진 장관은 오후 6시 퇴근과 동시에 삼성전자로 달려갔다. 삼성전자에 사장직 사직서를 제출하기 위해서였다. 사장 퇴임식도 하지 못했다. 삼성전자에서 주는 기념패도 2년 후에 받았다.

진대제 정통부 장관은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 엘리트다. 이력도 화려하다. 1952년생인 진 장관은 경기고·서울대 전자공학과를 거쳐 국비유학생 1호로 미국 매사추세츠주립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매사추세츠대학에서는 2년간 수강한 전 과목에서 A를 받아 그 학교의 전설이 됐다. 당시 국내 한 언론은 ‘국비유학생 1호 진대제, 전 과목 A 받아’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어 스탠퍼드대학에서 전자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그가 발표한 박사학위 논문은 ‘진대제 이론’이란 제목으로 반도체 교과서에 정식 소개됐다.

그는 1983년 5월 미국 IBM의 두뇌인 왓슨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입사했다. 왓슨연구소는 직원 2500명 중 800명이 박사였다.

그는 자신과 굳게 한 약속이 있었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술을 배우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다짐이었다. 그런 신념에 따라 2년 후 그는 삼성반도체로 자리를 옮겼다.

진 장관의 증언.

“삼성이 나를 스카우트했다는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내가 삼성에 찾아가 삼성반도체 미국법인 연구소에 입사하게 됐습니다. 고교 선배인 이일복 박사가 그곳 책임자였습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나 좀 데려가시오’ 했더니 그때는 ‘신참 박사는 안 받는다’며 거절하더군요. 2년이 지나 오라고 하기에 IBM 몰래 삼성에 가서 면접을 보고 사표를 냈습니다. 주변에서 최고의 직장을 그만두는 걸 보고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어요.”

그에겐 인생을 건 도전이자 도박이었다. 당시만 해도 삼성전자는 지금의 삼성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1985년 삼성에서 4MD램 개발팀장을 맡았다. 그는 밤낮없이 반도체 개발에 진력해 4MD램 시제품을 만들었다. 삼성에서는 1MD램 개발이 한창일 때였다.

그는 1987년 현지법인에 삼성 본사로 보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이때 현대전자 미국 연구소에서 이런 사실을 알고 극비리에 접촉해왔다. 그는 삼성에 사표를 내고 주위에 알리지 않고 귀국해 현대반도체와 연구실을 둘러봤다. 정몽헌 회장(작고)도 만났다.

그가 잠적한 것을 안 삼성에서는 난리가 났다. 우여곡절 끝에 신라호텔에서 송세창 삼성반도체 사장(삼성그룹 회장비서실장 역임)과 만났다. 모든 요구조건을 들어줄 테니 삼성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진 장관의 말.

“반도체 임원으로 발령내라고 요구했습니다. 임원은 이병철 회장 승낙을 받아야 한다며 이 회장과의 면담 자리를 마련해 주더군요.”

그는 삼성 본관 27층 삼성그룹 회장실에서 이병철 회장과 면담했다. 그 자리에는 이 회장과 신현확 삼성물산 회장(국무총리 역임), 소병해 회장비서실장(작고, 삼성화재 고문 역임)과 진 박사 4명만 참석했다.

이 회장과 진 박사는 경남 의령 출신으로 동향이었다. 그래서인지 면담 분위기는 훈훈했다. 주로 반도체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당초 15분 면담시간이 50분으로 늘어났다. 이 회장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는 1987년 9월 4월 기흥에 있는 삼성반도체 이사로 근무를 시작했다. 그의 나이 35세. 국내 최연소 임원 탄생 기록이었다. 이후 그는 4MD램과 16MD램을 잇따라 개발하면서 삼성의 ‘반도체 신화’를 창조했다. 그는 삼성종합기술대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 99%의 노력과 1%의 영감이 낳은 결과였다.

4MD램 개발 성공과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뒷이야기 하나.

퇴임을 20여일 앞둔 1988년 2월 8일.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경상현 한국전자통신연구소장(정통부 장관 역임, 현 ICT총연합회장)으로부터 4MD램 개발 성공 보고를 받고 “정말 기분이 좋다. 저녁에 한턱 내겠다. 반도체 개발 연구원들과 삼성, 현대, LG그룹 회장들을 초청하라”고 비서실에 지시했다. 이날 청와대는 마주앙을 건배주로 내놓았다.

진 장관의 증언.

“전 대통령은 과학기술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반도체 장비를 수입할 때 관세를 면제해주고 수도권에 공장을 짓도록 허가해주는 등 많은 지원을 해줬습니다. 만찬장 맨 앞줄에 이건희 회장과 정주영 회장, 구자경 회장 등이 앉고 나머지는 연구원 명찰을 달고 뒤에 앉았습니다. 전 대통령은 만찬에서 특유의 입담을 자랑했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전쟁 나면 과학자들은 대전 이남으로 대피시킬 특별계획도 다 마련해 놓았다’고 하셨습니다.”

경상현 소장은 “전 대통령이 술값이 모자라면 내 머리카락을 팔아서라도 보태겠다”고 해 만찬장에 폭소가 터졌다고 회고했다.

진 장관의 말.

“5공 시절 우리 집에 경찰이 특수보안장치를 설치해줬습니다. 집 앞에 순찰함을 만들어 경찰이 정기 순찰을 돌았고 집에 들러 이상 유무를 확인하곤 했습니다.”

그는 삼성에서 초고속 승강기 승진을 거듭했다. 1992년 상무, 1995년 부사장으로 승진했고 1999년 정보가전총괄 사장에 임명됐다. 그는 사장 취임식도 기존 관행을 파괴했다. 진 사장은 카우보이모자에 콤비양복 차림으로 나타나 파워포인트로 작성한 ‘디지털미디어사업 총괄의 비전’을 발표하는 것으로 취임식을 대신했다.

2002년 12월 국제가전쇼(iCES)에서 동양인 처음으로 개막 기조연설을 했다. 한 시간 연설을 위해 그는 6개월간 준비했다. 세 명의 배우와 클린턴 대통령에게 연설을 지도했던 사람으로부터 연설 코치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미스터 칩’과 ‘미스터 디지털’ ‘IT카우보이’ 등의 별명을 얻었다. 노력과 열정이 준 선물이었다.

IT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