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22일.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건희 삼성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처음 대면한 날이었다. 공교롭게 삼성 출입을 맡자마자 부딪힌 첫 이슈가 회장 사임이었다. 서울 태평로 삼성그룹 본사 지하 강당에서 이 회장을 비롯한 전 계열사 사장이 도열해 경영 쇄신안을 발표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당시 삼성은 백척간두였다. 내부 인사의 고발성 폭로가 이어지면서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비자금 조성, 경영권 불법 승계,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 배정, 조세 포탈 등으로 삼성은 사면초가였다. 연일 언론의 질타가 이어졌고 결국 이건희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이라는 적지 않은 형량을 선고받았다.
삼성은 위기였다. 절체절명의 고비였다. 그러나 역시 시스템의 삼성, 관리의 삼성이었다. 총수와 핵심 사장단 일부가 퇴진했지만 특유의 관리시스템이 저력을 발휘했다. 경기가 어렵고 총수 공백이 컸을 법도 한데 건재했다. 오히려 승승장구했다. 삼성전자 매출은 2008년 121조원에 이어 2009년 136조원, 2010년 154조원, 2011년 165조원으로 날개를 달았다. 일각에서는 협력업체의 피와 땀이라고 폄하했지만 숫자만 놓고 보면 삼성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다. 글로벌 기업을 위한 토대를 닦았다.
다시 이 회장을 만난 건 2년 후인 2010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 ‘CES’ 현장이었다. 20개월 만에 나타난 이 회장은 짤막하게 “안심하기는 이르다.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며 삼성 위기론을 들고 나왔다. 이후 삼성은 물을 만난 듯 매년 신기록을 세워 나갔다. 삼성전자 영업이익은 2011년 1분기 2조7954억원에서 2년 만인 지난해 3분기 사상 최대인 10조1635억원을 달성했다. 지난해 4분기 8조3112억원으로 주춤했지만 올 1분기 8조4887억원으로 다시 회복세에 올라타는 듯했다. 일부 매체에서 흘러나온 ‘마하 경영’도 이때쯤으로 기억한다.
모든 게 순탄해 보였다. 그러나 위기의 전조일까. 2014년 4월 10일. 삼성으로서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숱한 역경과 여론의 뭇매에도 꿋꿋했던 이 회장이 돌연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 2008년 당시 누구도 퇴임을 예상 못 했듯, 이번도 전혀 예상 밖이었다.
2008년과 2014년. 그때와 지금은 천양지차다. 총수 공백이라는 상황은 똑같지만 삼성 실적은 곤두박질쳤다. 8일 가이던스로 발표한 삼성전자 잠정 실적은 ‘어닝 쇼크’ 자체였다. 2012년 2분기 이후 8분기 만에 영업이익 7조원대로 추락했다. 한때 10조원을 넘나들던 이익은 7조2000억원으로 가까스로 ‘7조원 턱걸이’에 그쳤다.
‘관리의 삼성’으로 불리며 유독 위기에 강했던 삼성 DNA는 어디로 간 것일까. 이유는 하나다. 시스템, 사람, 조직 등 변한 게 없다. 문제는 수년 전부터 거론됐던 성장 동력이다. 한마디로 스마트폰을 포함한 TV·반도체 등 핵심 사업이 임계점을 찍었다. 삼성을 떠받쳐 왔던 기존 사업은 한계에 달했지만 미래 먹거리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딱히 돌파구도 보이지 않는다.
위기라고들 얘기하지만 진짜 위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게 정답이다. 기껏해야 이제 위기의 시작이라는 ‘시그널’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래서 삼성이 더 불안하다. 삼성, 진짜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강병준기자 bjk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