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후지쯔가 반도체 생산을 접는다. 과거 반도체 시장을 호령하던 일본의 영향력이 날로 줄어드는 모습이다.
닛케이신문은 후지쯔가 반도체 주력 생산 공장인 미에 공장을 대만 UMC에, 아이즈와카마츠 공장은 미국 온세미컨덕터에 단계적으로 매각할 계획이라고 20일 보도했다.
후지쯔는 가전용 화상처리 시스템 LSI를 생산하는 미에 공장을 UMC에 매각하기로 합의했다. 우선 양사가 공동 출자로 자본금 500억엔(약 5000억원) 규모의 반도체 파운드리(수탁생산) 업체를 연내 설립하고 공장을 이관한다. 초기 UMC의 출자 비율은 30% 정도로 오는 2016년까지 후지쯔의 지분율을 50% 미만으로 낮춘다는 계획이다. 다른 반도체 제조사와 펀드 등에도 추가 출자를 받을 계획이다.
차량용 칩을 생산하는 아이즈와카마츠 공장은 미국 온세미컨덕터에 매각하기로 하고 최종 조율작업에 착수했다. 온세미컨덕터는 올해 일부를 출자하고 수년 내 출자 비율을 과반수로 높인다는 방침이다. 매각 금액은 100억엔(약 1000억원)가량이다.
후지쯔는 이번 매각으로 10년 이상 이어온 반도체 사업 구조조정이 일단락될 것으로 기대한다. 실적과 투자 부담이 큰 반도체 사업을 대폭 축소하고 클라우드 등 IT 서비스에 집중한다는 전략이다. 회사는 지난해부터 반도체 생산 공장 매각을 추진해왔다. 대만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 TSMC와 매각을 논의했지만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바 있다.
후지쯔의 지난 회계연도 반도체 사업 매출은 3216억엔(약 3조2000억원)이다. 공장 매각 이후 반도체 관련 사업은 슈퍼컴퓨터 연산용 반도체와 자사 제품을 위한 개발 등 극히 일부만 남아 연 매출 규모는 100억엔(약 1000억원)가량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반도체 시장을 주름잡던 일본이 급격히 힘을 잃고 있다. 1990년 세계 10대 반도체 기업 명단에 6개 기업 이름을 올린 일본은 이제 20위권 안에 3개 업체만이 간신히 남는 수준이 됐다.
일본 반도체 산업의 도태는 세계적인 반도체 생산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탓으로 분석된다. 세계 반도체 시장은 미국 퀄컴 등 설계와 개발을 전문으로 하는 팹리스 업체와 TSMC 등 파운드리 업체로 나뉘었지만 일본 기업은 개발부터 생산까지 모두 고집했다. 대형 투자를 지속한 삼성전자도 빠르게 치고 올라왔다.
이 결과 반도체 강자였던 히타치제작소, 미쓰비시전기, NEC는 자력으로는 경쟁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이들 3사는 이에 따라 자사가 보유했던 메모리 반도체와 시스템 반도체 사업을 각각 엘피다와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로 나눠 영광 재현에 나섰다. 하지만 지난해 엘피다는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의 손에 넘어갔다.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는 산업혁신기구와 도요타로부터 출자를 받아 재건 중이다. 이번 후지쯔의 공장 매각으로 일본 내 생산을 유지하고 투자를 지속하는 기업은 도시바와 소니 정도다.
국내 반도체 업계는 빠르게 힘을 잃고 있는 일본의 상황이 국내 기업에 반사이익으로 돌아올지 위협이 될지 여부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시장 선두로 자리매김한 메모리 반도체보다는 육성에 노력 중인 시스템 반도체에 관심이 쏠린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 관계자는 “일본의 하락은 우리에게 기회이자 위기”라며 “시스템 반도체의 경우 이 시기에 국내 업체들이 시장을 파고들지 못한다면 미국과 대만의 시장 영향력이 더 커져 향후 국내 산업에 큰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말했다.
김창욱기자 monocl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