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민간 기술신용평가기관(TCB)으로부터 지방 소재기업의 기술평가서를 받은 한 시중은행은 경악했다. 기술력이 필요 없는 저가형 고무 소재 외주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이 우량 기술기업으로 둔갑했기 때문이다. 기술평가서 내용은 해당 기업 기술력 검증보다는 고무 소재 시장 현황과 미래 시장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그것도 인터넷에서 베낀 내용을 짜깁기했다.
#10년 넘게 A은행과 거래한 한 IT기업은 최근 해당 은행직원으로부터 제의를 받았다. 대출 금리를 조금 낮춰줄 테니 기술금융 상품으로 갈아타라는 말을 들었다. 대신 기술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말에 기술심사를 입을 맞춰 허위로 통과했다고 설명했다.
정부의 실적 치중 기술금융 확대 주문에 기술신용 평가 과정이 의혹투성이로 드러났다. 전문 심사인력 부재와 은행권의 짜 맞추기 기술대출 확대로 기존 거래 기업이 기술형 기업으로 둔갑하거나 엉터리 부실 심사를 함으로써 ‘좀비 기업’을 양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가장 큰 문제는 심사 평가를 담당하는 민간 TCB기관의 전문성 부족이다. 두 개 민간 TCB기관이 보유한 전담인력은 70명이 채 안 된다. 하지만 최근 6개월간 기술금융 평가 실적만 5000건에 달한다. 제대로 된 기술 심사가 진행됐는지 시간적으로 불가능한 기술심사가 횡행하고 있다.
◇TCB 산출정보 엉터리…일반 기업이 기술형 우량기업으로 둔갑
TCB의 부실화는 기술 금융 실적 확보용으로 악용되고 결국 기술기업과 거리가 먼 기업들까지 자금 지원을 받는 ‘통로’로 이어진다. 정부당국의 실적 쌓기 기술금융 주문에 밀려 은행들은 기술평가서를 ‘기술금융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인증 자료로만 활용한다. 리스크를 없애기 위해 제대로 된 기술평가를 하는 게 아니라 신용도가 높고 탄탄한 기존 거래기업을 기술금융 대출로 갈아 태우는 꼼수를 펴고 있다.
금융당국이 혁신성 평가 등을 통해 실적 높은 은행에 인센티브를 부여하자 앞뒤 안 가리고 대출 실적에만 올인하고 있는 형국이다.
실제로 시중은행 기술금융 대출금액의 75%가 기존 거래기업에서 실행된 것으로 드러났다. 담보나 신용등급 등 기존 대출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유망기업을 지원하겠다는 취지는 무색하게 됐다.
김정훈 새누리당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해 7월 기술금융이 도입된 이후 12월까지 기술신용평가기관(TCB) 평가서를 반영한 기술금융 대출액은 8조9247억원으로 이 가운데 75%(6조6897억원)가 기존 거래기업에 실행됐다. 건수로는 총 9818건 중 63.9%(6274건)에 해당됐다.
대구은행은 총 165건의 기술금융 대출 중 80%(132건), 경남은행은 124건 중 74.2%(92건)가 기존 거래하던 기업에 지원됐다. 기업은행은 2482건 중 71.4%(1771건)가 기존 거래기업에 실행돼 뒤를 이었다. 은행 혁신성 평가에서 1위를 차지한 신한은행도 기술금융 대출의 80%를 기존 거래기업에 몰아줬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부실뇌관, TCB 황당 사례 속출…인력 전문성도
기술금융의 실적 쌓기는 부실심사를 촉발했다. 빠른 시간 안에 여러 기업에 자금을 지원해야 하는 금융당국 ‘줄 세우기’가 심사 부실로 고스란히 연결된다는 것이다. 특히 민간 TCB기관은 1건당 100만원 상당의 심사료 수익 경쟁이 붙으면서 기술 실사와 보고서 작성 인력을 따로 두고 시간을 절감하는 꼼수 심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해당 기업의 현장 실사를 담당한 인력이 기술 평가서를 만드는 게 아니라 특정 항목만 실사 전에 점검 항목으로 찍어 확인 후 그럴싸하게 기술 평가서를 만들어 은행에 제출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 부품 기업의 특허나 기술 수준을 보는 게 아니라 단순히 문제가 없는지, 시장 전망은 밝은지 등을 체크해 평가서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평가서를 위한 평가서’를 만들고 내용만 짜깁기한 허위 평가서가 양산되고 있다.
한 은행권 기술금융 관계자는 “TCB기관에서 오는 평가서 중 내용을 짜깁기하거나 실사인력과 보고서 작성 인력이 다른 것은 이미 통용되는 사실”이라며 “은행도 이 같은 심사 내용을 믿지 않고 기술금융 실적으로 잡기 위한 인증용 자료로 사용 후 보관만 하고 있다”고 전했다.
민간 TCB기관도 은행의 실적을 맞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상황이다. 심사 인력 구하기도 힘든데다가 은행들이 기술금융 실적을 늘리기 위해 심사 신청을 뭉텅이로 요청해 온다고 지적했다.
이들 TCB기관은 심사 인력을 늘리기 위해 보증기금의 퇴직인력을 기술금융 전문 인력으로 채용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한 기관은 국내 보증기관사 퇴직인력 등을 실제로 채용했고, 웃돈을 주고 보증업무 인력을 빼온 것으로 확인됐다. 문제는 이들 인력이 기술심사 경험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지점에서 서류 업무를 했거나 이미 현장에서 떠난 인력을 다시 채용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전문성이 필수인 기술 심사에 비전문 인력이 대거 채용돼 부실심사에 기름을 붓고 있다.
이 같은 인력 빼가기 현상은 금융당국의 기술금융 부흥대책에서 비롯된 부작용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금융위는 기술거래사, 변리사, 기술사, 3년 이상 연구소 근무연구원 또는 3년 이상 기술평가 업무에 종사한 경력자 등 10명 이상을 보유해야 한다는 TCB 지정요건으로 내걸었다.
민간 TCB들은 당장 이 조건을 맞추기 위해서는 기술평가 업무 경력자를 대거 채용해 금융당국의 지정요건을 맞춰야 하는 상황이다. 조건을 맞추지 못하면 금융위는 업무승인 자체를 해주지 않는다.
◇기술심사 대기건수만 9000건 육박…부실심사 막을 제도적 장치 마련해야=현재의 기술심사 관행을 뜯어고치지 않는다면 수년 후 엄청난 좀비 조직 양산은 물론이고 기술금융 시장 자체가 망가질 수 있다는 경고가 곳곳에서 제기된다. 정부는 기술금융 확대를 위해 모태법이 되는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에 계류 중이다. 기술신용 심사와 기업에 대한 평가를 체계화하기 위해서는 신용정보보호법을 개정해 기업이나 법인이 보유한 기술을 제대로 검증하고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개정안은 기술신용정보에 기업, 법인의 신용도, 신용거래능력 등을 포함시켰고, 제공할 수 있는 파인프라인을 만들자는 내용이 핵심이다. 하지만 법이 계류되면서 기술신용평가 시스템 구축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또 제대로 된 기술기업 발굴을 위해 금융위원회와 산업통상자원부 간 공조체계가 절실하다. 기술금융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구태를 버리고 산업부가 보유한 기술평가, 가치평가 모델 등을 공유해 새로운 기술금융 평가 모델을 확립해야 한다.
아울러 은행의 중소기업 기술력 평가 대출을 자생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목표라면 기존 정책금융 수단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은행은 비용이 많이 들고, 노하우 없는 기술평가 역량을 어렵게 강화해 나가는 것보다 보증기금사와 연계한 협력체계를 갖추거나 정책금융 부문에서 기술금융부문을 특화해 늘리는 방법도 검토해볼 만하다.
길재식기자 osolgil@etnews.com, 박소라기자 sr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