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일어난 사상 초유의 주한 미국 대사 피습 사건으로 우리 정부는 사실상 비상 대응 국면에 들어갔다. 관계 부처별로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하루 종일 분주히 움직였다. 외교 채널을 통해 한·미 상호 협력에 이상이 없도록 하는 한편 자칫 대미 수출 등 경제 분야에 불똥이 튀는 것을 차단하는 데도 힘썼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이 산업계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정부 대응 노력에도 동맹국 주재 미국 대사가 공격당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어서 한·미 관계뿐 아니라 국제 외교가에도 파장이 불가피해 보인다.
◇주한 대사 피습…정부, 긴급회의 소집
피습 사건은 5일 아침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가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주최로 열린 조찬 강연회에 참석하던 중 일어났다. 연사로 참석한 리퍼트 대사는 강연에 앞서 조찬을 위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조찬이 시작되자마자 행사장에 있던 김기종 씨가 25㎝ 길이 흉기로 리퍼트 대사의 오른쪽 뺨과 왼쪽 손목 부위를 공격했다. 리퍼트 대사는 피습 직후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다. 생명에 지장은 없는 상태다.
김 씨는 현장에서 ‘남북 대화 가로막는 전쟁훈련 중단해라! 우리나라에게 전시작권통제권 환수시켜라’라는 문구가 담긴 유인물을 한 참석자에 건네고 리퍼트 대사를 공격했다. 김 씨는 현장 참석자들에게 제압당한 후 경찰에 체포됐다.
김 씨는 문화단체 우리마당 대표로 활동하며 지난 2010년에도 주한 일본대사에게 콘크리트 조각을 던진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인물이다.
피습 사건이 일어나자 정부는 곧바로 비상 대응에 들어갔다. 이날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추경호 국무조정실장 주재로 긴급 관계차관회의를 열었다. 외교부·법무부·행정자치부·국가안전처 차관과 경찰청장 등이 참석했다.
외교부는 다양한 외교채널을 통해 사건경위와 대응상황을 미국 정부에 설명하고, 이번 사건이 한·미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상호 협력하기로 했다. 법무부와 경찰청은 범행동기와 배후세력 여부를 수사하는 한편 신변보호·안전책임 관련자를 조사해 엄벌하겠다고 보고했다. 각종 외교시설과 국가기반시설 등 주요 시설 안전·경비 상황도 철저히 점검하기로 했다.
국회도 바쁘게 움직였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는 이날 오후 긴급 회의를 열어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 발생 경위를 보고받고 대응책을 논의했다.
◇박 대통령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
우리나라의 주요 동맹국이자 교역국인 미국 대사가 서울 한복판에서 흉기에 상해를 입는 일이 벌어진 것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중동 4개국을 순방 중인 박근혜 대통령은 세 번째 방문국인 UAE에서 현지시각 새벽 3시경 긴급 보고를 받고 우려를 표했다. 청와대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주한 미 대사에 대한 신체적 공격일 뿐만 아니라 한미 동맹에 대한 공격으로 결코 용납될 수 없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철저한 수사 및 경계태세 강화 등 필요한 제반 조치를 취하고 있다”며 “오바마 대통령과 미국 정부에도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완구 국무총리도 “진상파악과 배후 규명을 철저히 하고, 치료에 최선을 다하라”고 정종섭 행자부 장관과 강신명 경찰청장에게 지시했다. 조태용 외교부 1차관에게는 “미국 정부에 현 상황을 신속히 설명하고 협력 관계에 문제가 없도록 하라”고 주문했다.
정치권도 여야 할 것 없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엄중한 대응을 촉구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한미 동맹에 대한 테러”라고 비난했고,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정치적 목적의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여당은 6일 예정된 고위급 당·정·청 회의에서도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을 다루기로 했다.
◇불똥 어디까지 튀나
피습 사건 자체는 조기에 수습되겠지만 이로 인한 파장은 상당 기간, 폭넓게 확산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우리의 강력한 동맹국인 미국 대사가 공격당한 데다, 리퍼트 대사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의 과거사 관련 발언으로 외교가는 물론 우리 국민 사이에도 미국을 상대로 미묘한 기류가 형성된 마당이어서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심정은 복잡하다.
표면적으로는 양국의 공식적인 협력 관계에 금이 갈 정도로 직접적인 여파는 적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한·미 정부 모두 이번 사건이 양국 사회 전반에 걸친 갈등 구조로 번지기를 원치 않는 상황이다. 김 씨의 돌발 행동을 빌미로 양국 간에 대립각을 세웠을 때 어느 누구도 이익을 볼 상황이 아니라는 해석이다.
국제 외교 측면에서는 우리나라에 적지 않은 불이익이 예상된다. 미국과 양자 외교는 물론 일본 등 주변국을 둘러싼 다자 외교 측면에서 입지 약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외교를 넘어 경제·무역 분야로 불똥이 튈 가능성은 크지 않다. 우리 정부는 대미 교역과 투자 협력에 직접적인 악영향은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미국이 최근 세계 시장에서 경제 활기를 띠는 몇 안 되는 나라인 점을 감안해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모니터링을 강화할 방침이다.
박동형 KOTRA 로스앤젤레스 무역관장은 전자신문과의 통화에서 “피습사건은 불행한 일이지만 경제·산업계에는 영향이 제한적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 관장은 “사건발생 시간이 미국에서는 늦은 오후로 구체적 반응은 현지시간 5일 아침(한국시간 6일 새벽)이 지나봐야 수면 위로 떠오를 전망”이라 밝혔다. 미국 국내 이슈도 많은 데다 미국 언론의 특성상 우선 사실 전달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한국무역협회는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를 대상으로 피습이 발생한 데 대해 충격을 금치 못하며, 심신에 큰 상처를 입었을 리퍼트 대사의 조속한 회복을 기원한다”며 “가장 중요한 동맹인 미국과의 경제, 무역 관련 정책 공조에 부정적 영향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사건에 대한 우리 정부의 철저한 조사와 엄정한 조치를 촉구하며, 향후 유사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 달라”고 촉구했다. 한편 미국대사 피습사건이 있은 5일 주식시장에서는 경비업체인 에스원과 방위산업 관련주가 소폭 상승하며 주목받았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m, 홍기범기자 kbhong@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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