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살아남은 자의 슬픔

[데스크라인]살아남은 자의 슬픔

유명 정치인이 자살할 때마다 의문이 생긴다.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사회학자 뒤르켐이 구분한 세 가지 자살 유형 중 어디에 속할까. 자문자답도 해 본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그랬다. 국회의원 출신인 고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도 마찬가지다. 답은 명쾌하지 않다. 고인만이 아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자살이 일어나지 않는 사회는 없다. 세계에서 발생하며 자살률 역시 급격한 변동이 없다. 일종의 규칙적인 현상으로 여겨진다. 역설적으로 보면 정상적이다. 그러나 자살이 정치와 연관되면 성격이 달라진다. 정치인 자살은 메시지를 남긴다. 상징적 행위다. 사고사 또는 돌연사와 달리 의도하는 바가 분명하다. 인간이 가진 강력한 무기인 눈물과 함께 공격수단이 될 수 있다. 이기적 자살, 이타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이라는 유형화된 범주를 뛰어넘는다.

성완종 회장은 결과적으로 국가와 살아있는 권력에 항의했다. 고귀한 목숨을 본인의 진정성과 맞바꾸는 방식을 택했다. 국민 정서는 일견 약자 편이다. “오죽 했으면 그리 했겠나”는 반응이 적지 않다. 진실은 검찰 조사를 통해 밝혀질 것이다. 쪽지 속 8명 정치인은 사실 여부를 떠나 체면을 구겼다. 이완구 국무총리는 정치인생 최대 위기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사건은 국가 지도층 불신으로 이어졌다. 정치권에 대한 실망도 엿보인다. 정치자금 수단으로 지목된 비타500을 소재로 한 각종 패러디물은 국민 분노를 짐작하게 한다. 왜 그럴까. 한 정치인 자살로 촉발한 사건이 가지는 사회적 함의는 무엇인가.

현대 국가와 사회는 이른바 ‘사회계약설’에 기반을 둔다. 약육강식이 판치는 동물의 세계가 되지 않기 위한 사회 구성원 간 약속이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지만, 국민은 편의상 국가에 권한을 위임했다. 그래서 국가권력은 국민의 권리와 생명을 보호하는 수단이 돼야 한다. 보다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에게 권한과 권력을 부여하고, 대다수 국민은 국가가 부여한 의무를 다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정치권 모습은 이 같은 신의성실 규범에서 어긋난다.

행정부도 마찬가지다. 지난 16일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아마도 하늘 나라에 있을 단원고 학생들 눈물이 아니었을까. 세월호 사태 본질은 ‘국가의 부재’다. 골든타임이 흘러갔지만, 구조를 못했던 게 핵심이다. 관피아와 특정 기업인의 사익추구는 본질이 아니다. 1년이 지난 현실은 어떤가. 애써 외면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소극적이다. 세월호 사태는 현 정부 임기 끝까지 이슈가 될 개연성이 높다. 도망칠 통로가 없는 사각의 링과 비슷하다. 그래서 이해되지 않는다. 국민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보듬어 주는 국가를 원한다. 국가는 이 사실을 모르는 듯하다. 개인 요구와 사회 요구 간 균형이 맞지 않는다. 사회적 평형수 역할을 하는 우리 사회의 기제가 오작동하고 있다.

시간은 가진 자 편이다. 최근 정국을 강타한 8인 쪽지 사건도 언제가 기억 속으로 사라진다. ‘국가는 어디에 있었습니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 역시 공허한 메아리일 수 있다. 상처를 핥아주는 국가 부재 시대를 살아가는 건 어쩌면 숙명이다. 우리가 인정하고 감내해야 하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웃고 있을 것이다. 살아남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그들과 이 시대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슬픔이다.

김원석 글로벌뉴스부 부장 stone201@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