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많은 `빠른 추격자`가 필요하다

[데스크라인]많은 `빠른 추격자`가 필요하다

‘퍼스트 무버(새 분야를 개척하는 선도자)’.

우리 경제가 고도 성장기를 지날 무렵, 각종 보고서에 등장한 단골 용어다. 해외에서 새로운 기술(제품)이 이슈가 될 때마다 어김없이 강조됐다. 2000년대 들어 경제·산업 중장기 로드맵에서 빠지지 않는 ‘경제 살리기 만능 솔루션 정책’쯤 된다. 실제로 우리가 현 경제 규모에서 스마트폰과 같은 메가톤급 신성장 산업을 창출한다면 GDP 4만달러가 아니라 5만달러 시대 ‘퀀텀점프’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자. 우리 경제에서 ‘퍼스트 무버’ 체질 변화가 강조된 시점은 대기업 주도 성장전략 한계점과 맞닿아 있다. 빠른 추격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몇 안 되는 대기업 활약으로 우리 경제는 선진국 문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덩치가 커질 대로 커진 대기업으로서는 자신의 체급에 맞는 ‘포스트 패스트 팔로(빠른 추격) 아이템’ 발굴이 쉽지 않다. 우리 산업 정책이 퍼스트 무버만이 살길이라는 인식에 갇힐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경쟁국의 빠른 추격 위협에 마음만 급할 뿐, 개척자도 추격자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우리 산업계 현실이다.

산업계 플레이어를 ‘대기업-중견기업-중소기업’으로 나눠 놓고 보자. 우리 산업계가 빠른 추격에 나설 분야는 광대하다. 중견·중소기업에 ‘가장 빠른 추격자(패스티스트 팔로어)’ 지위는 여전히 간절한 목표다. 창조경제 아이템으로 주목받는 3D프린팅산업도 그중 하나다. 3D프린팅과 그 연관 산업은 세계가 주목한다. 대기업으로서는 뛰어들기에는 너무 작은, 바꿔 말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은 규모다. 중소기업으로서는 빠른 추격으로 외국 선발주자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만 있어도 그야말로 대박이다. 이미 양극화된 우리 산업계에 도전할 수 있는 플레이어가 많지 않은 현실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대기업을 포함해 빠른 추격 역량조차 갖추지 못한 산업 분야는 수두룩하다. 한때 빠른 추격자 위치를 확고히 했지만 무너져 내린 분야 또한 적지 않다. 지금 우리에게 퍼스트 무버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뛸 수 있는 플레이어군 확충이다. 그 층을 두텁게 해, 더 많고 더 다양한 빠른 추격자를 확보하는 것이다. 해외 매각 절차까지 밟던 하이닉스반도체가 경쟁력 있는 빠른 추격자로 살아남아, SK하이닉스로 탈바꿈해 우리 경제를 뒷받침하고 있는 상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산업 체질을 퍼스트 무버로 바꿔 나가는 노력은 당연하다. 하지만 안정적 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빠른 추격자를 늘리는 작업도 병행해야 한다. 빠르게 쫓아가다 보면 먼저 가는 분야도 나오게 마련이다.

한때 3차 산업에 집중했던 선진국이 정책 방향을 제조 산업 기반 구축으로 돌리고 있는 작금의 분위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유형의 산업 기반이 미래 불확실성에 대비할 수 있는 든든한 자산임을 확인한 때문이다. ‘엔저’를 등에 업고 20년 만에 부활한 일본 또한 산업계 수많은 빠른 추격자군을 확보한 저력이 작용했다. 우리에겐 아직도 더 많은 빠른 추격자가 필요하다.

심규호기자 khs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