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멜레온은 외부 환경에 따라 몸 색깔을 변화시킨다. 소재 중에도 마치 카멜레온처럼 온도에 따라 반도체에서 도체로 변하는 신소재가 있다. 바로 머리카락 굵기 10만분의 1 수준인 0.8나노미터(㎚) 두께의 층상구조를 가진 다이텔레륨 몰리브데늄이다. 국내 연구진이 이 소재를 활용해 전력손실이 적고 동작속도를 대폭 향상시킨 차세대 반도체를 개발했다.
기초과학연구원(IBS·원장 김두철) 나노구조물리연구단(단장 이영희)과 양희준 성균관대 에너지과학과 교수팀은 공동연구를 통해 다이텔레륨 몰리브데늄을 이용해 고속으로 동작하는 2차원 반도체 소자를 개발했다. 반도체 소자 전극접합 부위에 레이저를 쬐어 전류가 잘 흐르는 도체로 바꾸는 방식을 사용했다.
다이텔레륨 몰리브데늄은 몰리브데늄(Mo)과 텔레륨(Te) 조합으로 만들어졌으며 반도체와 도체 물성 모두를 가질 수 있다. 그래핀처럼 원자 하나 두께의 2차원 평면물질이며 3차원 물질인 기존 실리콘 소자를 대신해 휘어지고 늘어나는 차세대 소자용 소재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상온에서 특정 부위 물성을 제어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연구팀은 상온에서 안정적으로 존재하는 다이텔레륨 몰리브데늄 초박막에 레이저를 조사하고 조사된 부위에서만 반도체에서 도체로 상전이를 유도해 냈다. 상온에서는 반도체 상태지만 레이저를 쬐어 고온에 노출된 부분만 도체 상태로 변하는 소재의 성질을 이용했다.
연구팀은 레이저를 통한 반도체-도체 상전이가 텔레륨 결핍 때문인 것도 규명했다. 2차원 소재 물리 및 구조 상전이 연구분야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 연구성과가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는 레이저로 원하는 패턴대로 단일물질 내에 반도체-도체 계면을 자체적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기존에 이종물질인 반도체와 도체를 접합하던 방식에서 나타나는 전력손실이나 속도저하 등 단점을 보완했다.
통상 반도체 소자는 전극역할을 하는 도체(금속)와 전자 통로역할을 하는 반도체 물질을 접합해 제작하는데, 두 물질 간 경계면의 전기저항이 커 소자 작동에 필요한 에너지 중 3분의 2가 열에너지로 소모된다.
연구진은 새로운 소자를 만들 때 반도체 소자 특성을 유지하면서 금속전극과 접합 부위만 도체상태로 바꿔 두 물질 경계에서 생기는 저항을 낮춤으로써 에너지 손실을 줄였다. 이를 통해 소자 효율을 올리는 데도 성공했다.
이번에 개발한 소자는 전자기기 동작속도를 좌우하는 전자이동도가 기존 2차원 반도체 소자 대비 50배 이상 뛰어났다. 초고속, 저전력 전자기기 구현에 적합하다.
공정이 간단해 제작비용도 줄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반도체 소자를 만들려면 채널 역할을 하는 반도체와 전극 역할을 하는 도체를 접합하는 복잡한 공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연구팀이 사용한 레이저 패터닝 방법을 활용하면 2차원 반도체 소자 제작공정이 크게 단축돼 제작비용과 시간을 절감할 수 있다.
실용화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2차원 소자의 산업적 응용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공학적 시험에 수년 정도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후속 연구를 통해 소재 대면적화, 표면가공 기술 등을 개발해야 한다.
연구를 주도한 양희준 성균관대 교수는 “2차원 소재의 상전이 제어로 새로운 소자 개념을 제시했다”며 “5년 안에 반도체 산업에 응용 가능한 소자를 개발하겠다”고 밝혔다.
연구결과는 세계적인 과학저널 ‘사이언스(Science)’ 7일자에 게재됐다.
권건호기자 wingh1@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