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양적완화의 덫

[데스크라인]양적완화의 덫

2000년대 중반. LG전자를 이끌었던 김쌍수 부회장은 직원에게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직원들은 쌍칼(?) 부회장이 도입한 TDR 프로그램에 눈물을 쏙 뺐다. 사업장마다 ‘30% 혁신’ 바람이 불었다. 어떤 기업이든 5% 변화는 이루기 때문에 30%를 목표로 삼아야 혁신이 가능하다는 경영론이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부분 수정이 아니라 전면 리모델링 같은 대대적 혁신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불현듯 김 부회장이 떠오른 것은 우리 경제가 처한 현실이 심상치 않아서다.

우리 경제가 점점 시계 제로 상황으로 빠져든다. 왜 이럴까. 경기부양을 목적으로 한 양적완화 정책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을 시작으로 전 세계가 돈 풀기를 시작했다. 유로존과 일본도 동참했다. 우리나라와 중국도 유사한 처방을 취했다. 현실은 어떤가. 결과적으로 양적완화 정책은 ‘유동성 함정’으로 이어졌다. 엄청난 돈이 시중에 풀렸지만 정작 가계에서는 쓸 돈이 없다. 전통시장 상황도 마찬가지다. 5만원권 지폐는 자취를 감췄다. 지하금고에 잠자고 있다. 대기업은 수백조원에 이르는 현금을 움켜쥐고 정부와 딜을 시도한다.

한국판 양적완화는 부동산 경기 활성화에 기여했지만 결과적으로 가계와 국가 ‘재정 건전성’에도 영향을 끼쳤다. 가계부채는 매달 사상 최고치를 돌파한다. 무려 1130조원을 넘어섰다. 자영업자 대출규모도 8월 말 230조원까지 뛰었다. 1억원 이상 빚을 진 다중채무자는 사회경제적으로 큰 영향을 미칠 뇌관이다. 국가 역시 빚을 동력삼아 굴러간다. 정부는 386조7000억원을 지출하는 내년도 예산안을 편성했다. 원안이 확정되면 내년도 국가채무는 올해보다 50조원가량 늘어난 645조원이 된다. 국내 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40%를 넘어선다.

문제는 미국이 사실상 양적완화 종료를 선언한 점이다. 미국 금리인상 여부와 폭을 결정할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가 개막했다. 안건 채택 행위 그 자체는 양적완화 시대 종언을 의미한다. 사실상 양적완화로 대변되는 돈잔치는 끝났다. 이제부터는 ‘쩐의 전쟁’이다. 다국적 자본이 시장을 지배할 가능성이 크다. 양적완화 덫에 갇힌 각 나라 경제도 휘청거릴 수 있다. 벌써부터 신흥국에서 자금이 대거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중국은 지난달에만 1130억달러가 증발했다. 외화 보유가 사상 최대로 감소했다.

우리의 선택은 뭘까. 빚을 줄이고 시장 유동성을 높여야 한다. 과감한 빚 딜(Debt deal)이 필요하다. 정부가 집행하는 세출을 30% 줄이는 과감한 혁신안 마련도 고민해야 한다. 세금부담을 줄여 가처분소득을 높여야 가계에 숨통이 트인다. 열기구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국가채무 증가현상에도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확장적 재정지출 정책은 재검토 대상이다. 장기적으로 국가채무를 줄이는 것은 미래세대를 걱정하는 현 정부 통치철학에 부합한다. 재정분야 비정상의 정상화를 실천하는 길이다. 공무원 연금개혁과 노동개혁 주된 명분 아니었던가.

양적완화 덫으로 빠져드는 한국 경제호를 향한 경고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다양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골든타임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표류하거나 좌초할 수 있다. 양적완화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파괴적 혁신을 기대해 본다. 실행력을 높이는 30% 혁신론에서 답을 찾아보자.

김원석 글로벌뉴스부 부장 stone201@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