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한국판 `정치적 자살`을 기대한다

[데스크라인]한국판 `정치적 자살`을 기대한다

1987년 10월 25일 고려대에서 열린 ‘거국중립내각쟁취실천대회’에 참석한 DJ와 YS는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두 달가량 앞둔 시점이었다. 찬 기운이 감지됐다. 결국 단일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1노 3김’ 구도에서 노태우 후보가 13대 대통령으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로부터 25년 후 상황은 다르게 전개됐다. 2012년 대통령 선거는 무소속 안철수 후보가 전격 사퇴하면서 극적 반전이 기대됐다. 결과는 박근혜 후보 당선이었다. ‘(후보 단일화 실패) 역사가 반복되면 안 된다’는 게 안철수 후보의 설명이다. 정권교체를 바라는 지지층 열망을 외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고뇌에 찬 결단으로 이해된다. 3년 전 안철수 캠프 정책 중 기억에 남았던 건 국회의원 정수 축소였다. 새 정치를 화두로 내건 안 후보는 300명을 200명으로 줄이자고 주장했다. 물론 정치권 반응은 냉랭했다. 한마디로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는 응답이 돌아왔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안철수 후보로 단일화됐더라면 결과는 어떠했을까. 지금처럼 의원 정수 조정문제가 논란이 될까.

지난 13일 이탈리아 국회 결정은 여의도 정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탈리아 상원은 의석을 315석에서 100석으로 줄이는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하원 통과와 내년 10월 국민투표를 남겨뒀지만, 최대 난관은 넘었다. 현지 언론은 지난 13일을 ‘슈퍼 화요일’에 비유했다. 심지어 블룸버그는 ‘정치적 자살’로 표현했다. 의원정수 축소는 국민에 청량제가 될 수 있다. 대다수 국가 국민은 정치지도자들의 기득권 내려놓기와 특권폐지를 보고 싶어 한다. 여의도는 ‘고비용·저효율’ 상징으로 해석되는 게 현실이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신선한 충격이다. 스스로 특권을 내려놓았다. 물론 상·하원 양원제를 운영하는 이탈리아와 우리 정치 역사와 구조는 다르다. 한꺼번에 100명을 줄이는 건 현실정치에서 쉽지 않다. 진정한 대의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정수 확대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다양한 계층 의견을 반영한다는 전제조건에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정치권 논의는 앞뒤가 바뀌었다. 각 당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기존 지역구 의원들 기득권 문제가 맞물렸다. 배가 산으로 가는 느낌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정수 확대에 무게를 두는 눈치다. 새누리당은 동결을 주장하지만 머릿속은 복잡하다.

관전 포인트는 제1 야당이다. 혁신위가 369명으로 늘리는 안을 제안한 직후 여론 역풍을 맞았지만 여전히 정수 확대를 꾀한다. 정수 축소를 정치개혁으로 바라보는 대다수 국민 정서와 괴리됐다. 고통을 분담할 정당문화도 찾기 힘들다. 불출마 선언 같은 개개인 희생과 용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내년 총선결과도 장담할 수 없다. 2017년 대선은 더더욱 어려워 보인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비례대표 의원 수 확대보다 권역별 비례대표제라는 시스템 도입에 힘써야 한다. 지역주의 해소라는 명분이라도 있다. 단순 비례대표 의원 수 확대는 당내 최대 난제인 계파정치를 심화시킬 뿐이다.

2015년 가을이다. 지금 우리나라 정치혁신을 어느 당이 이끄는가. 새 정치를 몸소 실천하면서 국민 눈높이를 맞추는 정당이 어디인가. 야당은 선거 패배 때마다 뼈를 깎는 쇄신을 외친다. 현실은 어떤가. 여당 같은 야당을 국민은 어떻게 생각할까. 한국판 ‘정치적 자살’을 기대해 본다.

김원석 글로벌뉴스부 부장 stone201@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