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박지호기자 jihopress@etnews.com
이판정 넷피아 대표는 인터넷 업계 풍운아다. 세계 최초로 한글 인터넷주소라는 인터넷 신대륙을 발견해 인터넷 기린아로 등장했다. 세계 95개국 자국어 인터넷주소 시스템을 개발해 창업 3년 만에 매출이 120배로 폭증했다. 300억원에 기업을 매각하라는 외국기업 제안도 뿌리쳤다. 우리 혼이 담긴 한글서비스를 외국기업에 넘길 수 없다는 소신에서다. 호사다마(好事多魔)인가. 이후 혹독한 시련이 닥쳤다. 이 대표 표현을 빌리면 “이용자 가로채기라는 잘못된 인터넷 시장 구조”로 회사는 파산 직전까지 내몰렸다. 회사를 살리려 동분서주하다 신장기능이 망가져 신장이식수술을 받아 회생했다. 인터넷 신천지 개척 불꽃을 재점화해 지난 9월 1일 창립 20주년을 맞아 제2의 도약을 선언했다.
이 대표를 10월 22일 오전 만났다. 이 대표는 이날 오후 서울 동대문구 세종대왕기념관에서 외솔상을 받았다. ICT업계 인사가 외솔상을 받는 것은 드문 일이다. 지난 9월에는 ‘바른 인터넷의 날’을 제정했고 ‘인터넷 난중일기’란 책도 냈다. 전성기에 비해 회사규모나 매출이 10분의 1로 줄었지만 이 대표는 활력이 넘쳤다.
-외솔상 수상을 축하한다. ICT업계 인사로는 처음이 아닌가.
▲그건 잘 모르겠다. 큰일도 안 했는데 송구한 마음이다. 굳이 한 일이라면 한글인터넷서비스를 했고 한글날을 국경일로 다시 지정해달라며 몇 년간 떡을 돌렸을 뿐이다.
정부는 2013년 한글날을 법정공휴일로 재지정했다. 이 대표는 공휴일 재지정 5년 전부터 10월 9일이면 어김없이 ‘한글날 국경일 재지정을 바랍니다’라는 문구를 넣은 떡을 국회와 관련기관에 돌렸다. 한 해 떡값만 수천만원에 달했다고 한다.
-창립 20주년을 맞아 제2의 도약을 선언했는데 내용이 궁금하다.
▲지난 20년 슬로건은 ‘인터넷주소의 자국화’였다. 미래 슬로건은 ‘모든 사람과 사물을 위한 실명 도메인을’로 정했다. 많은 사람이 넷피아를 한글도메인 회사로 잘못 알고 있다. 넷피아는 대기업 횡포로 연 200억원 이상 매출이 줄어들어 누적 손실액이 5000억원 이상이지만 그로 인해 혹독한 구조조정을 했다. 좌절하지 않고 업무에 집중해 100건이 넘는 관련 특허를 확보했다. 인간과 사물을 연결하는 운용체계에 사용할 자국어 실명인터넷네임 자동교환시스템을 고도화했다. 새로운 콘셉트의 유니언 포털을 준비해 지난 9월부터 테스트하고 있다. 2016년 1월 선보일 예정이다.
-9월 1일을 ‘바른 인터넷 날’로 제정했는데 앞으로 구상은.
▲인터넷은 우리 생활 필수 도구다. 하지만 인터넷은 명암이 있다. 좋은 점은 더 장려하고 나쁜 점은 없애자는 취지에서 9월 1일을 인터넷의 날로 정했다. 이날은 넷피아가 세계 최초로 자국어 실명인터넷주소를 상용화한 날이다. 아직은 임의 기념일이다. 매년 행사를 한다.
-선언문은 누가 만들었나.
▲창조경제스마트뉴딜실천연합과 웹 발전연구소, 넷피아가 공동으로 작성했다. 선언문은 ‘누구나 쉽고 편리하게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도록 접근방식을 개선하고 다양화한다’를 포함해 5개 항이다.
-현행 인터넷 접속방식 문제점으로 포털 가로채기를 주장했는데.
▲인터넷 주소창에 전자신문을 입력하면 전자신문 홈페이지로 가야 하는데 지금은 포털로 간다. 기업이름과 co. kr를 치면 직접 기업으로 연결하지만 co. kr 없이 기업이름만 입력하면 포털을 거친다. 이런 구조는 고객 가로채기나 다름없다. 기업이름을 입력해 다른 사이트가 나와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 게 현실이다. 중소기업이 아무리 홍보를 해도 전화같이 고객과 직접 연결할 수 없다. 넷피아 서비스는 하루 3000만여건에 달했다. 연간 100억건을 넘는다. 100만 기업이 연간 1만건 전화를 남에게 빼앗긴 셈이다. 인터넷 비정상을 정상화해야 한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나.
▲영문 도메인을 포털로 돌리면 위법이지만 한글 실명은 포털로 연결하면 법에 저촉하지 않는다. 큰 모순이다.
-인터넷 주소창과 검색창 차이점을 일반인은 잘 모른다.
▲주소창은 개별 기업을 찾는 창이다. 검색창은 개별 기업 콘텐츠를 찾는 창이다. 브라우저 제작사들이 다른 개념을 마치 같은 것처럼 교묘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브라우저 전쟁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남의 고객 뺏기다. 정부나 지식인이 이런 일에 뒷짐 지고 있으면 안 된다.
-어떻게 해야 하나.
▲간단하다. 통신망에서 가로채기로 부당이득을 얻으면 처벌하면 된다. 2009년 방송통신위원회가 인터넷주소자원관리법을 개정했지만 시행을 안 한다. 대통령령으로 시행하면 된다. 중소기업은 ‘키워드 광고’ 비용을 줄일 수 있다.
-한글인터넷주소서비스와 자국어인터넷서비스 현황은.
▲지금 국내는 10% 정도만 사용한다. 자국어 인터넷서비스는 모두 중단한 상태다.
넷피아는 1999년 9월 1일 세계 최초로 자국어 인터넷주소를 상용화했다. 6개월 만에 한국통신(현 KT)과 데이콤 같은 국내 주요 통신사 50여사와 한글주소 서비스를 시작했다. 국민 90%가 한글인터넷주소를 사용했고 95개국 자국어인터넷주소서비스를 구축했다. 3년 만에 회사 매출이 120배 성장했다. 2003년 대구에서 열린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자국어 인터넷서비스를 선보여 인기를 모았다. 자국어 서비스는 인종과 국가, 계층 구분 없이 자국어만 알면 누구나 정보바다를 헤엄칠 수 있는 다리였다. 그러나 2007년 KT가 한글주소인터넷서비스를 중단하면서 고전하기 시작했다. 법정소송으로 검찰수사도 받았다. 연매출 250억여원에 직원 250여명이던 회사는 부도 위기까지 추락했고 직원이 7명에 불과한 때도 있었다. 이 와중에 건강악화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가 2005년 7월 대표이사로 복귀했다. 2007년 1월부터 11월까지 이틀마다 네 시간씩 투석치료를 받다 필리핀에서 신장이식 수술을 받았다.
-미국 기업이 인수를 제안했다는데 왜 거부했나.
▲2000년 1월 미국 리얼네임스가 300억원에 넷피아를 인수하겠다고 했다. 솔깃해 실사도 했다. 그런데 한글을 기반으로 한 사업이고 민족 혼이 담긴 한글인터넷 주소체계를 돈과 바꾼다는 게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자식에게 부끄러운 부모가 되기 싫었다.
-2011년 10월 한글인터넷주소 서비스를 정부에 기부한다고 발표했는데 결과는.
▲건전한 인터넷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한글인터넷주소 서비스를 정부에 기부채납하는 방식으로 기부하겠다고 제안했다. 소프트웨어(SW)는 사례가 없다고 해 답보상태다.
-특허침해 소송은 결론이 났나.
▲일부 승소하고 일부는 진행 중이다. 일부는 추가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2013년 4월 설립한 세종행복 누리는 잘 운영하나.
▲인터넷사업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적 기업으로 설립했다. 회사 여건이 좋지 않아 적극 추진하지 못했다. 앞으로 회사 경영이 좋아지면 알차게 추진할 방침이다.
-성공과 시련을 다 겪었는데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나.
▲내게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주어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어려워도 길은 있다. 즉 궁즉통(窮則通)이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지난 9월 ‘인터넷난중일기’를 펴냈다.
이 대표는 이 책에서 과거 일을 중심으로 왜곡된 인터넷 시장 구조를 냉정하게 비판했다.
-경영 원칙과 회사 현황은.
▲신뢰 경영이다. 직원은 20여명이다. 매출은 30억원 정도다. 좋아지고 있다.
-정부에 바라는 점은.
▲농경시대 일자리 창출은 농지개척이다. 사이버시대는 사이버농지 개척이다. 인터넷은 경제주체 도구다. 인터넷 자체 진흥이 아니라 도구를 통한 경제주체 진흥을 해야 한다. 자국어 실명도메인 네임 국가표준화 제정으로 인터넷주소자원관리법 시행령을 빨리 실시해야 한다. 자국어인터넷주소 종주국이 되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넷피아 미래비전은.
▲모든 기업명과 모든 사물에 실명으로 접속하는 네트워크 유토피아 구축이다.
-벤처인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국내 시장만 보지 말고 세계시장을 보고 사업을 해야 한다.
-좌우명과 취미는.
▲다학다사(多學多思)다. 취미라면 걷기다. 집 뒷산을 날마다 다닌다.
이 대표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변리사 준비를 하다 1995년 넷피아를 창업했다. 병역특례업체로 지정받았고 2003년 세계 초일류기업에 선정됐다. 한글인터넷주소서비스 특허출원 당시 돈이 없어 특허사무소 메일시스템을 구축해 주고 그 비용으로 특허를 출원했다. 2002년 제2건국범국민위원회가 선정한 지식인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한국인터넷전문기업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넷피아는 직급이 3단계다. PD와 매니저, 팀장이다. 인턴이라도 처음부터 책임의식을 높이기 위해 PD라고 한다. 이 대표는 자가용이 없다. 월평균 수입을 보장해주고 모범택시를 이용한다. 기다릴 때 택시 승차장을 이용해 주차비를 절감하고 서울시내 길을 잘 알아 좋다고 한다. 그는 인터뷰를 끝내고 외솔상 시상식장인 서울 동대문구 세종대왕기념관으로 모범택시를 타고 떠났다.
이현덕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