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장난인가. 2009년 KT-KTF 합병 과정에서 혈전을 펼쳤던 통신사들이 6년 만에 그에 못지않은 파괴력을 가진 SK텔레콤-CJ헬로비전 합병 건으로 다시 만났다. 처지는 다르다. KT와 SK텔레콤은 공수를 교대했다. KT-KTF 합병 결사반대를 외쳤던 SK텔레콤은 이제 합병 당위를 설파한다. 반대로 KT는 합병 반대 선봉에 섰다. LG유플러스는 두 번 모두 합병을 반대했다. 흥미로운 점은 어제 상대를 공격했던 논리가 오늘 나를 해치는 무기가 된다는 점이다. SK텔레콤 합병 인가신청서 제출을 앞두고 전운이 감돌고 있는 지금, 6년 전 긴박했던 두 달에 어느 때보다 관심이 쏠린다.
◇2009년과 2015년…공수 뒤바뀐 통신시장
2009년 통신 시장은 시작과 끝을 KT-KTF 합병이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합병이 모든 이슈를 빨아들였다. KT는 그해 1월 20일 이사회를 열고 KTF 합병을 공식 결의했다. 연말부터 떠돌던 풍문이 사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합병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다음 날 바로 합병인가 신청서를 옛 방송통신위원회에 제출했다. 치밀한 준비가 있었다는 방증이다. 2월 25일 공정거래위원회, 3월 18일 옛 방통위 승인과 인가가 나면서 불과 두 달여 만에 합병작업이 끝났다.
물론 엄청난 반대가 있었다. 선봉은 SK텔레콤(SK브로드밴드 포함)이었다. 특히 ‘지배력 전이’에 공격이 거셌다. 당시 정만원 SK텔레콤 사장은 KT가 인가신청서를 제출한 날 기자회견을 자청해 “두 회사가 합병하면 전체 통신시장과 통신자원을 KT가 독점하게 돼 경쟁이 심각하게 제한될 것”이라며 “KT의 유선시장 독점력이 더욱 고착화되고 이동전화시장으로까지 지배력이 전이될 것”이라고 반발했다.
SK텔레콤은 ‘공정경쟁’ 문제도 제기했다. 핵심은 ‘필수설비’였다. 통신케이블 관로(管路)와 전주(전신주)를 KT가 독점하면서 이를 경쟁업체에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기통신사업법에 따라 필수설비를 의무 제공해야 하는데, 이를 하지 않아 유선전화, 초고속인터넷 등 유선시장에서 독점적 지배력이 고착화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당시 KT 필수설비 제공률은 전주 4.2%, 관료 0.6%에 불과했다. SK텔레콤은 필수설비 제공 조직을 KT에서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SK텔레콤이 주장했던 지배력 전이와 공정경쟁이라는 반대논리가 6년 만에 부메랑으로 돌아가고 있는 점은 통신 역사의 아이러니다. KT 등 경쟁사가 이 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KT는 SK텔레콤 무선지배력이 유선에 이어 방송까지 이어질 것으로 우려했다. KT 측은 “SK텔레콤 무선지배력은 유선시장에 지속적으로 전이돼 왔다”며 “CJ헬로비전 인수로 방송시장에도 지배력이 확대돼 유료방송까지 무선의 끼워 팔기 상품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배력 전이는 곧 공정경쟁 문제기도 하다. LG유플러스는 “합병이 성사되면 SK그룹군은 유료방송 시장점유율 26%, 초고속인터넷 점유율 30%가 된다”며 “시장지배력이 전이되면서 유료방송 사업자가 고사하는 등 심각한 공정경쟁 저해 문제가 나타날 것”이라고 반대를 분명히 했다. LG유플러스는 또 “SK텔레콤은 CJ헬로비전 알뜰폰 가입자도 인수해 이동전화 시장점유율이 51.5%로 높아지는 등 독점구조가 심화될 것”이라고 반발했다. 경쟁이 제한되면서 결국 피해는 소비자에게 전가될 것이라는 논리다.
6년 전과 가장 다른 점은 이번 합병에 ‘방송’이 끼어 있다는 점이다. 유·무선 통신 내에서 이뤄진 지금까지의 합병과 달리 이번엔 통신과 방송 간 합병이라는 점에서 더욱 큰 논란이 예고되고 있다. 6년 전에는 없었던 논란거리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당장 KT는 유선방송구역 78개 가운데 23개 구역에서 SK그룹 유료방송 점유율이 60%를 넘게 된다며 합병을 강력 반대하고 있다. LG유플러스 역시 케이블TV 뉴스제작권을 활용해 선출직 정치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며 반발했다. 궁극적으로 중앙정부에 막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 인가에 쏠린 ‘눈’…방송 포함돼 복잡할 듯
2009년 KT-KTF 합병 스토리는 공정거래위원회 조건 없는 승인, 옛 방송통신위원회 조건부 인가로 마무리됐다. 업계의 엄청난 반발을 생각하면 의외로 싱겁게 끝난 셈이다. 사실 이런 결과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최시중 방통위원장이 “사실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며 일찍부터 KT 합병에 긍정적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심사 과정도 두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당시 방송통신위원회는 △필수설비 제도개선 △유선전화 및 인터넷전화 번호이동 절차 개선 △광대역 통합정보통신망(BcN) 구축 등의 조건을 달아 KT-KTF 합병을 인가했다. 반KT 진영이 줄기차게 요구했던 독점해소 방안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결과였다. KT는 경쟁 사업자의 필수설비 접근성을 높일 방안을 제출하고 유선 번호이동이 쉽도록 절차도 개선해야 했다. 하지만 합병으로 얻는 이득에 비하면 큰 부담은 아니라는 게 업계 중론이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KT-KTF 합병을 조건 없이 허용한 근거를 살펴보면 당시 정부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공정위는 필수설비 독점 문제를 방통위나 공정위 규제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봤다. 결합판매를 통한 지배력 전이 역시 오히려 가격경쟁을 촉진하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고 해석했다. 원가 이하로 파는 약탈적 가격책정은 규제로 대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KT 자금력을 이용해 KTF 마케팅 경쟁을 도울 것이라는 주장에도, 대기업인 SK군이나 LG군이 이동전화 시장 경쟁에서 밀려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게 공정위 생각이었다.
지배력 전이나 공정경쟁 문제를 조건부과(필수설비 제도개선 등)와 규제(약탈적 가격책정 금지 등)로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SK텔레콤-CJ헬로비전 합병은 2009년과 달리 국내 첫 통신-방송 간 합병이라는 점에서 정부 인가 과정이 더 복잡할 것이라는 게 통신업계 안팎의 관측이다. 실제로 전기통신사업법, 방송법, 인터넷 멀티미디어방송사업법(IPTV법) 규제관문을 통과해야 하고 공정거래위원회 기업결합심사도 넘어야 한다. 방송 특성상 단순히 시장논리로만 판단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최성준 방송통신위원장은 지난 11일 기자간담회에서 “(SK텔레콤-CJ헬로비전 합병에서) 방송산업으로서 케이블TV 역할과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며 “다양한 지역성을 가진 방송이 살아나야 한다”고 말했다. 지역 문화와 특색을 잘 살리는 케이블TV 고유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전국방송인 IPTV 사업자가 지역방송인 케이블TV 사업자를 인수해도 되는지도 논란거리다. 박헌용 KT CR협력실장(전무)은 12일 기자간담회에서 “전국사업자가 지역독점사업자를 인수하면 안 된다는 것은 방송통신의 기본 정책이다. 순간적으로 점유율이 늘기 때문”이라며 “더욱이 인수하는 사업자가 이동전화 지배적 사업자기 때문에 지배력 전이가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지배력 전이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합병 심사 결과가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독과점을 방지하고 경쟁을 활성화하는 것이 통신방송의 중요한 정책적 목표 가운데 하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2009년에는 공정위와 방통위가 지배력 전이 문제를 심각하게 판단하지 않았다. 결합상품을 통한 지배력 전이에 전체 할인율 상한이 20%기 때문에 규제만 제대로 한다면 지배력 전이가 일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본 것이다. 오히려 가격이 내려가면서 소비자 편익이 늘어날 것으로 봤다. 하지만 ‘유선→무선’보다는 ‘무선→유선’ 방향으로 지배력 전이 가능성이 더 높다는 우려가 있어 이번에는 정책 당국이 다른 판단을 내릴 가능성도 있다.
더욱이 2009년과 달리 이번 합병에는 알뜰폰 1위 사업자인 CJ헬로비전의 85만 가입자가 포함돼 있어 심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5700만명이 넘는 이동통신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지만, 시장활성화 정책의 중요한 카드 하나가 사라지는 셈이어서 당국 부담이 커지는 것도 사실이다. 알뜰폰은 3개 사업자 독과점 체제인 이동통신시장 ‘판’을 흔들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작지 않은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김용주기자 kyj@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