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도체 50년]<6> 삼성, 6개월만에 반도체 공장 완공… 반도체 신화 서곡

이병철 삼성 선대 회장이 1983년 경기도 기흥의 반도체 공장 부지를 살펴보고 있다.
이병철 삼성 선대 회장이 1983년 경기도 기흥의 반도체 공장 부지를 살펴보고 있다.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 회장은 이른바 `2·8 도쿄 구상`으로 반도체 사업 진출을 확정했다. 이후 한 달 뒤인 1983년 3월 15일 `왜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발표문을 통해 반도체 사업 추진을 세상에 알렸다.

이에 앞서 삼성은 공장 건설을 위한 준비 작업을 조용하게 착착 이뤄내고 있었다. 8개월 전인 1982년 7월부터 공장 부지 물색에 들어갔고, 여러 후보지를 검토한 끝에 그해 12월 경기도 기흥을 공장 부지로 최종 선정했다. 반도체는 다른 산업과 비교해 고도의 정밀성과 청정도를 요한다. 다른 업종의 공장이 있으면 반도체 공장 건설이 어렵다. 지금의 기흥은 첨단 산업단지로 우뚝 서 있지만 당시에는 야산 천지인 시골 동네에 불과했다. 그러나 공기가 깨끗하고 소음이나 진동이 없었다. 산업 용수 역시 풍부했다. 서울과의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았다. 고급 두뇌 확보가 용이할 것으로 생각했다. 원자재 수입과 제품 수출 역시 편리하다고 판단했다.

1983년 삼성반도체통신의 기흥사업장 기공식.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이병철 삼성 회장.
1983년 삼성반도체통신의 기흥사업장 기공식.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이병철 삼성 회장.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세상에 알린 삼성은 1983년 4월 반도체 사업을 맡은 삼성반도체통신을 통해 1차로 기흥에 10만평 부지를 확보했다. 7월에 부지 조성, 9월에 공장 건설을 본격 시작했다.

이병철 회장은 당시 삼성석유화학에 근무하고 있던 성평건 소장을 기흥반도체 초대 공장장으로 임명하고 `지상명령`을 내렸다.

“6개월 만에 공장 건설을 완료하시오.”

장비 납품 업체나 컨설팅을 맡은 외국 관계자들은 “6개월은 불가능하다”고 손사래를 쳤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반도체 공장 건설은 빨라야 18개월이 걸렸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당시 기흥은 잡초와 잡목이 무성한 야산이었다. 야산을 깎아 6개월 만에 공장을 건설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불가능한 지시였다.

이 회장이 이런 지시를 내린 이유는 당시 시장 상황 때문이었다. 1983년은 64K D램이 없어서 못 팔 때였다. 호황이 끝나기 전에 시장에 진입, 막대한 시설 투자비를 조기 회수하겠다는 게 이 회장의 구상이었다.

성 소장은 `양질 시공, 공기 단축, 공사비 절감`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는 전 직원을 소집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반도체는 제품 수명이 짧고 엄청난 투자비가 소요됩니다. 제품 시장 진입을 앞당길 수 있는 공장의 조기 완공은 사업에 큰 플러스 요소가 됩니다. 회장님이 `6개월`이라는, 다소 무모하다 생각되는 시간을 제시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기적을 이뤄내야만 합니다.”

1980년대 기흥 삼성 반도체 공장 전경
1980년대 기흥 삼성 반도체 공장 전경
현재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사업장 전경
현재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사업장 전경

삼성은 휴일도 없이 24시간 피와 땀을 쏟아붓는 공사로 불가능에 도전했다. 삼성이 공장 건설 시간을 줄이기 위해 수행한 전략은 바로 동기화(同期化)였다. 모든 작업을 동시에 추진하자는 것이었다. 대체로 건설공사 공정은 릴레이 달리기와 같다. 한 공정이 끝나면 다음 공정으로 넘어가는 것이 정석이었다. 동기화 전략은 공정을 맡은 모든 직원이 모든 작업 공정을 동시에 추진하자는 것이었다. 이 과정은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고단하고 힘들었다.

9월 기공식 직후 반도체 1라인의 골조 공사가 시작됐다. 전기와 물 공사도 동시에 추진됐다. 200여 종류의 생산설비 발주는 철저한 시장조사 직후 이뤄졌다. 이 회장은 장비 발주와 동시에 170명의 설비 신입사원을 차출, 장비 제조업체로 파견시켰다. 이들은 반도체 장비 업체에서 설비가 제작되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난 후 장비와 함께 돌아왔다. 돌아온 그들은 이미 훌륭한 설비 엔지니어로 성장해 있었다. 장비 테스트나 응급 처치 요령을 따로 익힐 필요가 없었다. 이 덕에 1~2개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는 것이 삼성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공장 건설 막바지에 큰일이 터졌다. 고난도의 클린룸 공사가 겨우 완료됐지만 공장 진입로가 포장되지 않아 장비를 들여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가의 포토 장비가 문제였다. 포토 장비는 충격과 진동에 약하다. 자갈밭인 진입로로 장비를 싣고 들어오면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포토 장비는 이미 김포공항에 도착한 상황이었다. 보수팀 전원이 4㎞에 이르는 공장 진입로 평탄 작업에 투입됐다. 연구소 연구원들도 이 작업을 거들었다. 포토 장비를 실은 운송업자에게는 “가능한 한 천천히 와 달라”는 부탁이 전해졌다.

김포공항에서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출발한 운송 차량은 가능한 우회도로를 택해 시속 30㎞가 채 안 되는 속력으로 기흥을 향해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오후 5시. 마지막 커브를 돌아 기흥공장 진입로에 도달한 운전기사는 두 눈을 의심했다. 좁은 자갈밭이던 공장 진입로 4㎞가 한나절 만에 평평한 도로로 바뀌어 있었은 것이다.

1984년 5월 삼성 기흥 공장 준공식. 맨 앞줄 좌측부터 금진호 상공부 장관, 채문식 국회의장, 이병철 삼성 선대 회장.
1984년 5월 삼성 기흥 공장 준공식. 맨 앞줄 좌측부터 금진호 상공부 장관, 채문식 국회의장, 이병철 삼성 선대 회장.

삼성 기흥 반도체공장은 착공 6개월 만인 1984년 3월 말에 마침내 완공된다. 총 건설 장비 2000여대에 연인원 26만명이 투입돼 하루도 쉬지 않고 밀어붙인 결과였다. 국내에서도 공기 단축 사례는 많지만 처음 시도하는 반도체 공장이란 점에서 기록에 남을 단시간이었다. “불가능하다”고 한 관련 외국인들은 경탄했다.

그러나 이는 신화 탄생의 서곡에 불과했다. 삼성이 단 10년 만에 세계 메모리 업계 정상에 오르는 첫걸음일 뿐이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